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 인기로 국민기업 포항제철 각인

포항제철소내에서 꽃피는 팔도강산 녹화 장면.
포항제철소는 7·3준공 후 1년 후에야 본격적인 대국민홍보와 함께 지역사회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으로 무장한 채 앞만 보고 달려온 그들은 설비가 조업 시작 이후 1년이 지나도록 정상 가동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깥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제철소는 1기 고로 완공 직후 한때 국민의 시선을 받았지만, 여전히 어떤 회사인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방송홍보
일일연속극 꽃피는 팔도강산 제철소 촬영 모습.
1) ‘넝쿨째 굴러들어 온 弘報 대박’ 꽃피는 팔도강산


포항제철 앞에는 1기 설비 준공 후 국민과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기업 홍보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종합제철사업은 국가적인 대규모 프로젝트였지만 당시 일반 국민이나 포항시민들은 구체적으로 종합제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제품을 생산해 어떻게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하는 알 수 있는 기회나 방법이 전혀 없었다.

이때 넝쿨 째 저절로 굴러들어 온 호박이 바로 TV 일일연속극이다.

드라마 섭외가 들어온 것도 조업 1주년과 총생산 1백만 톤 돌파의 절묘한 타이밍이었고 기대 이상으로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포항제철소는 국민의 안방 깊숙이까지 국가 기간산업인 ‘산업의 쌀’로서 대한민국 산업근대화의 든든한 견인차로 각인 시키는 데 성공했다.

포항제철은 이 같은 기대 이상의 홍보 효과를 놓치지 않고 아예 꽃피는 팔도강산 드라마의 제철소 촬영장면을 그대로 신문광고로 제작해 전면광고로 살포했으며 작가와 연출자를 집요하게 설득해 당초 촬영 기간을 더 연장해 3개월 동안 포항제철소 분이 방영되도록 했다.

2006년11월 인기 일일연속극 꽃피는 팔도강산 제작진이 32년 만에 다시 포항제철소를 둘러본 자리
이 드라마에서는 문오장 씨가 고로공장장으로 민지환 씨가 고로의 노전(爐前)작업원으로 등장했고 최은희 씨, 김희갑 씨, 한혜숙 씨, 김자옥 씨, 윤소정 씨 등 당대 초호화배역진이 등장했다. ‘꽃피는 팔도강산’은 회를 거듭할수록 회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증폭시켰고 용광로 등 낯선 철강업을 소개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때 심지어 미국에까지 녹화 방영될 정도로 인기가 놓았고 김희갑 씨와 황정순 씨는 명예사원이 되기도 했다.

1974년 포항시민회관에서 처음 포항시민앞에 선 박태준사장.
포항제철은 조업1년이 지난 1974년부터 본격 지역협력과 대외홍보를 시작했다.사진은 74년7월 포항시민회관에서 열린 꽃피는 팔도강산 올스타쇼
고(故)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도 출연자를 초청한 칵테일 파티 자리에서 ‘꽃피는 팔도강산’ 덕분에 (포철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신입사원 모집 광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고마워하기도 했다.

박태준 사장이 포항시민 앞에 처음 선 것도 그맘때쯤이었다.

마침 1974년 7월 22일 포항시민 시공관(지금의 중앙아트홀)에서는 꽃피는 팔도강산의 종영을 축하하고 또 제철소 조업 주년을 기념해 방위성금 모금 행사가 진행되었다.

꽃피는 팔도강산에 출연한 탤런트가 총출동한 올 스타쇼도 겸했다. 이때 박태준 사장은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서서 포항제철소의 오늘을 위해 열렬하게 성원해준 포항시민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1980년대 초 포항제철소 공보과(홍보팀)요원들.
2) 위기 때마다 외풍 차단하고 회사를 살린 ‘홍보의 힘’

△홍보로 막은 포스코 주식의 장외매각

정부는 1987년 3월, 주식시장 안정화를 위한 방침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시중은행 보유 포스코 주식을 장외(場外)시장에서 입찰방식을 통해 매각할 방침이라는 것. 포스코 임직원들은 경악했다. 정부 취지와 달리 재벌기업이 공기업을 지배할 우려가 있었고, 증권시장 질서가 교란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대주주인 정부이고 보니 뾰족한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박태준 회장은 당시 이대공 상무와 조용경 홍보차장을 불러 “선열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만든 회사가 특정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나라 경제에 엄청난 부담이 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라고 지시한다

즉각 ‘홍보전’이 시작됐다. 서울의 모든 언론사를 분담해 주필, 논설위원, 편집국장, 경제부, 정치부, 산업부, 심지어 만화가에 이르기까지 찾아다니며 포스코의 입장을 호소했다. 언론의 반응은 생각보다 적극적이었고 거의 모든 언론이 파격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급기야 안기부도 정부 입장을 철회하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서를 4월 20일경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4월 말 결국 정부는 그동안의 방침을 철회했다. 포스코의 집요한 대국민 홍보전과 언론의 이해, 국민적 관심이 어우러져 나온 최상의 합작품은 1년쯤 뒤인 1988년 6월 10일, 포스코가 국민주 1호 기업으로 공개되면서 결실을 보았다.

1988년 6월 포스코 국민주1호.

△제2제철 논쟁, 맨투맨 홍보전으로 잠재우다

1978년 국내 산업계에 제 2제철 설립이 빅 이슈로 떠올랐다.

포철은 첫 단계 승부를 여론싸움에 걸었다. 무엇보다 홍보력의 우위가 절실했지만 국영 기업인 상대 대기업에 비해 홍보예산과 인력에서 절대 열세였다. 당시 이대공 - 윤석만 라인은 4월 1일 창립 10주년 때 대대적인 홍보작전을 박태준 사장에게 보고했고 이를 박 사장이 수락했다. 3월부터 4월 초까지 각 언론사 사장단부터 주필단, 논설위원단, 편집국장단, 경제부·산업부장단, 포스코 출입기자단에 이르기까지 상세 시찰 및 취재일정을 짜서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직접 들을 수 있는 홍보를 전개했다. 全 홍보인력이 전력을 쏟은 결과 4월 1일 각 언론에서는 일제히 포스코 10년의 업적에 박수를 보내는 보도를 쏟아냈다. 뉴스 26건, 사설·해설 10건, 인터뷰 1건, 특집 45건, 가십 기타 4건, 모두 86건. 그리고 여론은 자연스럽게 포스코 쪽으로 기울었다.

특히 포항제철은 최고경영자들도 직접 홍보전 일선에서 뛰었다. 제2 제철 논쟁이 불붙었던 1977년과 1978년에는 조선일보 주필 등 주요 언론사 간부를 포항제철소를 초청, 현장을 일일이 안내하며 국가 기간산업의 현장과 철강산업 경쟁력에 관해 맨투맨으로 홍보전을 펼쳤다.

포스코홍보의 산증인 이대공 前 부사장

[인터뷰] 이대공 前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최고 홍보 키워드, 진정성·프로근성"

“홍보란 이슈와 이벤트가 있어야 잘 먹히는데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포스코는 국영기업이어서 홍보인력과 예산 면에서 대기업을 따라갈 순 없었지만 10주년, 20주년, 그리고 고로 설비완공 등 명분이 있을 때 총력 홍보전을 전개해 큰 효과를 봤죠”

이대공 씨는 포항 출신으로 말단 직원에서부터 상무를 거쳐 홍보담당 부사장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 포스코 홍보의 산 역사라. 아직도 그의 폰에는 수천 명의 언론인 전화번호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고 수백 명의 기자와 논설위원 전화번호는 통째로 외우고 있었다.

1969년, 제철연수원 연수계장으로 입사한 그는 1973년 7·3준공 이후 본격적인 대외홍보가 필요할 때 그해 6월 홍보책임자인 공보과장으로 발탁된 후 2년 만에 차장, 1978년 말에는 최연소, 초고속 부장으로 승진하는 등 홍보의 전문화를 구축했다.

그는 포스코의 홍보는 다른 민간 대기업보다 인력과 예산에서 열세였지만 홍보이슈가 있을 때마다 회장에서부터 말단 홍보맨까지 일사불란한 총력전을 펼쳐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제2제철 실수요자 선정 때와 정부의 포스코 주식 장외매각 추진, 철강재 원가공개 등 고비마다 정직한 홍보로 언론의 지지 이끌어냈다고 한다.

그는 또 “조직에 몸담고 있을 때 여러 번 진퇴의 고비가 있는 것이 홍보일이지만 때로는 직(職)을 걸어놓고 과감한 승부수를 걸어야 하는 것이 포스코 홍보맨의 운명”이라며 후배홍보맨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고의 홍보 키워드는 ‘진정성’과 프로근성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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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웅 작가·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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