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의용군 참전 손대익·최현우 옹 인터뷰

▲ 손대익(오른쪽)옹과 최현우 옹이 포항 용흥동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전시실에서 자신들의 학창시설 사진과 전우들의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의병 활약으로 이겨낼 수 있었던 것처럼 6·25전쟁 또한 학도의용군이 큰 역할을 한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제68주년 6·25전쟁을 앞두고 포항시 북구 용흥동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에서 21일 만난 학도의용군 손대익(86·포항시 북구 송라면)옹과 최현우(85·포항시 북구 증흥로)옹의 한 목소리다.

손 옹은 6.25전쟁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포항중학교 6학년 재학 중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와 내 고장을 지키고 나서 공부하자’고 마음먹고 친구들과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부족한 무기 등 열악한 환경 속 맨손 제식훈련만 받고 제17연대에 배속됐지만, 호국의 일념으로 기계·안강전투, 인천상륙작전 등 주요 전투에서 수색대와 소총수로 참전했다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전투에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일화와 정확한 판단으로 중공군 포로 생포와 무기를 노획한 무용담을 풀어내는 모습은 90을 앞둔 노인이 아닌 전쟁 당시 홍안의 청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기계·안강 전투 등에서 적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전우이자 친구의 이야기와 한강 철교 폭파 등 나라가 힘이 약해 겪는 고난을 풀어낼 때는 눈시울을 적시며 깊은 회한에 잠기기도 했다.

그는 두 번의 화랑무공훈장을 비롯 많은 훈·표장을 받았고, 1954년 7월 하사로 만기제대 후 40여 년간 교사 생활을 마치고 안보 교육을 하고 있다.

손대익 옹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주한 선조와 6.25전쟁 한강철교 폭파 후 피난한 이승만 대통령,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선 곽재우 장군 등 의병과 학도의용군은 역사 속 시간만 다를 뿐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다시 반복된다”고 했다.

또 “남·북과 미·북 정상회담이 잇따라 열리면서 마치 통일이 된 것처럼 들 뜬 분위기에 국방의식 해이가 두렵다”며 “7.4 남북공동성명 등 여러 번 속아온 경험에 비춰 전적으로 믿어서는 곤란하다. 평화로 한 발짝 씩 나가기 위해서라도 주의 깊고 철저한 안보 대비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만난 최현우 옹의 참전은 다소 우연의 연속이었다.

포항 수산중학교 2학년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여름 방학 시작과 동시에 청하면 고향을 향하던 길, 트럭에서 우연히 만난 포항지구 학도호국단 청하지부장 선배의 권유 등을 통해서다.

‘인민군이 벌써 신광 비학산까지 왔다’는 선배 말에 이어 자연스레 적군에 대한 정보 파악과 전달 등 지원은 물론 무기까지 청하지서에서 지급 받아 비학산 전투에 참여하게 됐다.

사격 훈련 등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식 훈련을 받은 인민군의 총격을 받자 고향 집으로 도망치기도 했고, 인민군에 포위된 포항에서 벗어나 영덕 방면 전투에서 경계 임무와 식량·실탄운반 등 심부름도 했다.

특히 그는 “전투 중 총소리가 요란해 개인호 속에서 머리를 숙인 채 있다가 ‘여기서 싸우지 않는다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죽은 적군의 총을 뺐어 죽지 않으려고 싸움을 계속했다”고 해 거대한 전쟁 속 개인의 나약함과 인간의 무력감을 솔직히 털어놨다.

또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한 양동작전인 영덕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동병 동료들의 희생에는 지금도 비분강개한 모습이었다.

그는 1951년 2월 복교령에 의해 학교로 돌아와 졸업 후 포병 장교와 교사를 지냈다.

최현우 옹은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청소년 안보교육’,‘목적 있는 안보교육’이 중요하다”며 “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 교련 과목이 폐지되는 등 이후 교육은 상급학교 진학에만 치중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어 “너나 할 것 없이 통일을 외치고 있고 있지만 남북 화해와 통일은 커녕 영·호남 갈등도 아물지 않은 만큼 우리끼리 먼저 화합이 선행돼야 한다”라며 “평화에 안주하지 말고 안보 의식과 경각심, 국방력 강화에 매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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