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여 년 읽어왔던 책들을 정리하며
안부 없는 시인들의 시집을 펴보는데
아뿔싸! 벌써 수십 년, 긴 세월이 지나갔다.

책들을 한 권 한 권 손에 잡고 펴보다가
얼굴도 모르면서 받아 읽은 시집들이
부정도 긍정도 없이 비문(碑文)처럼 새겨 있다.

어떤 이는 청람(淸覽)하라고 / 어떤 이는 혜존(惠存)하라며
앞 지면에 공을 들여 / 인사를 건네 왔는데
책 무덤 만들어 놓고 / 나도 찾지 못한다.

어쩌면 내 시집도 손길 한번 못 받고서
비좁은 틈 끼어들어 꿈쩍 않고 있을 건데
잡초도 없는 무덤이 그 얼마나 답답할까.




(감상) 유명한 시인에게 시집을 보냈더니 안부도 없고 후에 우연히 만났더니 시집 받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때, 청람(淸覽)이니 혜존(惠存)이니 공들여 이름을 써서 주위 사람들에게 시집을 선물했더니 재활용품 함에서 자신의 시집이 발견될 때, 유명한 저자가 유명한 시인에게 친필로 사인하여 선물한 책이 주로 헌책방에서 발견될 때, 책을 받는 사람보다 책을 선물하는 저자가 오히려 더 고마워해야 할 때, 이 모두가 잡초 없는 책의 공동묘지를 만드는 일인데.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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