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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문인협회장 등록일 2018년07월08일 16시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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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문인협회장
나이가 들면서 식성도 변했고, 식사량도 줄었다. 조금만 먹어도 아랫배가 금방 불러오고 부른 배가 쉬 꺼지지 않는다. 젊은 날 생각하고 밥을 먹었다가는 그 부대낌을 더 오래도록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밥을 맛있게 먹기가 겁난다. 자칫 맛있게 먹었다가는 양을 초과하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기에 회에 기름진 외식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주말쯤 되면 그런 것 저런 것 다 당기지 않고, 상추에 된장을 끓여 고추장 큰 숟가락 떠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맛있게 먹고 싶어진다.

된장은 칼칼하게 끓여야 하리라.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넣은 기름진 것보다 매운 풋고추에 호박 뚝뚝 썰어 넣고, 파 숭숭 썰어 넣은, 그리고는 뚝배기에 부글부글 한참을 끓인 것이면 좋으리라.

이 여름 상추는 햇빛 많이 빨아들인 오후쯤 깔린 것이면 좋을 것이다. 물로 설렁설렁 씻으면 되살아날 듯 싱싱해지는 잎과 그 줄기에서 락투카리움 액이 젖같이 흐르는 것이면 더욱 쌉쌀해 입맛을 돋우리라.

고추장은 보리를 섞어 만든 덜 들러붙는 것이면 좋으리라. 금방 고추장단지에서 퍼온 것이면 금상첨화(錦上添花). 큰 숟가락으로 퍼 넣어도 그다지 비빔밥이 빨갛지 않고, 숟가락으로 비벼도 뭉치지 않는 것. 산딸기 같은 은은한 붉은색이 좋으리라.

밥은 보리가 3할쯤 섞인 금방 펀 뜨끈뜨끈한 것이어야 하리라. 나무로 불을 때 밥이 끓는 동안 솥뚜껑을 몇 번 열었다 닫았다 찌 재친 것이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그건 요사이 바랄 수 없는 것. 그저 금방 펀 따뜻한 밥이면 족하리라.

큰 양푼에 상추를 손으로 북북 뜯어 넣고, 밥을 솥에서 바로 퍼 주걱으로 상추 위에 뚝 떠 넣은 다음, 된장 뚝배기를 그대로 기울여 술술 붓고, 숟가락으로 슬슬 비비면 입안에서 침이 곧 돋으리라.

침이 돋는 만큼 숟가락 밥이 커지고, 입을 크게 벌려 밥을 떠 넣노라면 상추는 아직도 살아 입술 주변에 고추장을 칠하리라. 눈을 끔뻑이며 입안의 밥을 슬슬 굴리리라. 씹을 것도 없이 꿀떡꿀떡 삼키리라.

배는 불러도 이내 꺼지는 이 비빔밥을 더운 이 여름이 오면 맛있게 먹고 싶다. 변한 식성과 변한 레시피에 질이 든 입이지만, 아직도 어린 날 먹던 이 비빔밥의 맛은 더욱 되살아난다.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해가 지도록 놀다가 배가 고파 집으로 뛰어든다. 들에 갔다 오신 어머니가 밥을 짓는 부엌은 나무 타는 불빛으로 훤하다. 밥솥에서는 아직 밥이 잦고 있다. 밥이 다 되려면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고픈 배와 응석을 섞어 배고프다고 조른다. 그러면 엄마는 설익은 솥을 열어 밑에 있는 밥을 설렁설렁 푸고, 곧 이렇게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고 보면 비빔밥은 들밥이었다. 뛰어놀다 집에 와 상차림 전에 주린 허기를 막아주는 들고 서서 먹는 밥,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논과 밭가 그늘나무 아래서 들고 앉아 먹는 밥, 여러 명이 비좁게 들고 쪼그려 먹는 밥이었다.

그런 비빔밥이 요즈음엔 식당에서 돌솥 비빔밥으로, 전주비빔밥으로, 산채비빔밥으로 자리를 떡 잡고 떡 벌어진 상 위에 차려 나온다. 계란에 고명까지 얹어 제법 눈 허기를 지게 한다.

그러나 맛이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차림이 그럴싸하지만 모든 허례를 다 벗고 마음 놓고 먹던 그 맛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 더운 여름날 저녁. 엄마, 부엌, 상추, 된장, 고추장, 그리고 비빔밥이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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