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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농지개혁

박헌경 변호사 등록일 2018년07월16일 17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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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경 변호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한 후 전후 수습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태로 철수함으로써 일본에 의하여 점령되었던 동아시아 각국에는 힘의 공백 상태가 생겼다. 이러한 힘의 공백 상태로 인하여 동아시아 각국에는 좌우의 대립이 격화되고 급기야 중국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에서는 내전까지 발발하였다. 아시아의 대국인 중국에서는 황화강 이남의 중국 본토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장비와 병력면에서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던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만주지역과 황화강 이북에서 웅거하던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국민당과 내전을 치루기 전에 당의 슬로건으로 모든 농지는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실시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에 그 당시 중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이 물심양면으로 인민군을 지원하고 협조하게 되었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남침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양쯔강을 건너 남하하여 부패한 국민당 정부를 물리치고 1949년 마침내 중국 대륙을 공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당시 한반도 북쪽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공산당이 농지를 지주들로부터 무상몰수하고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지주들과 그 가족들은 토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인민재판에 의하여 숙청을 당하였다. 이때 공산당에 토지를 빼앗긴 지주계층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한 기독교세력 그리고 공산당의 질식할 듯한 압제를 거부한 지식인들이 남으로 월남하였다.

이러한 국내외 상황 속에서 한반도 남쪽에서도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농지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전향한 공산주의자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주로 지주들로 구성된 한민당에서 농지개혁법에 결사반대하였으나 국제정세를 판단할 줄 아는 한민당 당수 김성수가 지주들을 설득하여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법이 1949년 통과되어 농민들은 꿈에도 그리던 농지의 소유주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 국군 제14연대 내 좌익세력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을 겪으면서 이승만은 김창용을 앞세워 군부 내 좌익세력을 색출하여 숙청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1949년 7월까지 숙청된 군인이 약 5천명 가까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도 남로당 군책으로 처형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백선엽 등의 권유로 군부 내 좌익분자 명단을 넘겨주고 전향하여 처형을 면하였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에 자극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은 소련과 중공의 동의를 받아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하였다. 이승만은 남으로 후퇴하면서 좌익에서 전향한 공산주의자들과 민간인으로 구성된 보도연맹원들을 북한과 내통할 수 있는 위험분자들로 여기고 모두 총살시켜 버렸다. 이때 무고한 민간인들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많이 처형당하였다.

남침한 북한 인민군은 신속하게 서울을 정복하였으나 작전토론에서 남로당 당수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며칠만 기다리면 남한 내 좌익세력과 농민들이 호응하여 폭동을 일으킬 것이므로 그때 한강을 건너 남하하면 손쉽게 부산까지 내려가 적화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에 김일성은 서울에서 며칠을 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군부 내 좌익세력과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인하여 박헌영이 원하던 남한 내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인민군이 며칠을 서울에서 지체하는 동안 국군은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유엔군은 참전할 시간을 얻었다. 이 일로 인하여 박헌영은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을 김일성 세력으로부터 추궁당하여 미국의 첩자로 몰려 수많은 남로당 당원들과 함께 숙청을 당하였다.

국군의 주력 구성원은 대한민국으로부터 농지를 분배받게 된 남한 농민들과 북에서 공산당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공산당을 피하여 월남한 북한 출신들이었다. 대한민국이 북의 침략으로부터 소생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의 공도 컸지만 농지를 분배받게 된 남한 농민들과 공산당에게 토지를 몰수당한 반공 월남인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하여 수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로부터 10여 년 후 베트남 내전에서 세계 최강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많은 폭탄을 쏟아부었고 귀신 잡는 한국군이 용병으로 참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찌민의 북 베트남 공산군이 농민들의 지지를 업고 부패한 남 베트남 정부와 미국을 물리치고 베트남 적화통일을 완성한 것과 마오쩌둥의 인민군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국을 공산화한 것과 비교하면 자명한 일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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