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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허와 실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등록일 2018년07월17일 16시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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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건전한 판단력과 사회의식을 지닌 시민을 우리는 보통 ‘상식(common sense)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상식(常識)’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갖추어야 할 지식, 이해력, 판단력’을 가리킵니다. 상식적 인간들은 대체로 균형 감각이 있고 체면을 중시합니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명분이나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공민(公民)의 태도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상식에 충실한 사람들은 가히 법 없이도 살 사람들입니다. 그런 ‘상식’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판단’을 보완하고 교정해주는 천부적인 공통감각(의 역량)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상식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한다. ‘상식’은 아주 오래된 단어다.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이 교차되는 지점에 일종의 ‘공통적인 감각’이 있다고 믿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을 서로 비교하고 통합해 이성의 판단과는 또 다른 차원의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공통적 감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근대에까지 이르러 성숙한 존재의 조건을 정의한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이성적 사유와 더불어, 시대의 가치를 공유하는 상식적인 사유가 가능한 사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김정운, ‘남자의 물건’’

이성과 상식이 때로 따로 갈 수도 있다는 주장이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게 들렸습니다만 곰곰 생각해 보니 이성은 코드(문법)를 중시하고 상식은 맥락(환경)에 유의한다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코드와 맥락, 그 둘을 잘 조합해야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논리라면 굳이 마다할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 경우는 사회가 일단 제 정신으로 굴러가야만 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우리 사회가 보여주었던 집단적 ‘전두엽 장애현상’의 와중에서는 ‘공통적인 감각’으로서의 ‘상식’은 늘 이성적 사유에 역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미투(Me Too) 태풍에 일거에 쑥대밭이 되어버린 정계, 재계, 관계, 문화(체육)계, 교육계, 시대적 소명과 동떨어져 여전히 퇴행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과거의 권력집단, 그리고 소위 기무사 위수령 문건으로 드러난 오래된 군사문화의 오작동 같은 것들이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상식’ 하에서 살아왔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의 현실은 상당히 희망적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정당한 ‘상식’이 보호받고 존중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강조한 ‘이성과 상식의 조화’를 통한 성숙한 인간(사회)으로의 진입이 실제로 가능해질 수 있는 토대가 차근차근 마련되고 있습니다. 마침 이 글을 적고 있는데 TV에서 영화 ‘광해’와 ‘명량’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광해’에서는 가짜 임금(광대)이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의 참모습을 잘 보여주었고 그 장면이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시킨 바 있었다고, 그리고 ‘명량’에서는 ‘장수의 충(忠)은 백성과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임금을 탓하는 아들에게) 가르치는 이순신에게서 진정한 역사적 인간을 발견한다고, 패널들의 친절한 설명들이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실천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았던 그들 역사의 주인공들이야말로 이성과 상식이 조화를 이룬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배웁니다. 아무리 실천이 어렵다고 해도 끝까지 ‘상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요. 역사에서든, 영화에서든, TV에서든, 두고두고 배웁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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