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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섭 전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

민주당의 큰 정치인이었던 조병옥 박사의 아호가 ‘유석(維石)’이다. 이는 ‘시경(詩經)’과 ‘대학’에 근거를 둔 말인데, 국민이 정치지도자를 저 남산(南山) 위의 큰 바위같이 항상 우러러보니,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중심에 서 있는 지도자급 고위 인사는 매사를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요즘의 세태를 보면 지도자들이 언행에 책임과 신중함을 다하지 않는 것 같다.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정치인들은 나라의 모범이 되어야하는 데, 스스로 다짐한 약속을 예사로 버리며, 시류에 따라 말을 바꾼다. 사회 전체에도 책임 없는 빈말이 난무한다. “그건 그때 말이고” 라며.

춘추시대 공자가 태어날 무렵, 강남땅의 오(吳)나라에는 계찰(季札)이라는 훌륭한 인물이 왕명으로 중원 길에 올랐다. 가는 길에 서(徐)나라를 지나는데, 임금이 극진히 대접하던 중 계찰의 보검을 보고 갖고 싶어 했지만 차마 달라는 말을 못했다. 계찰은 서나라 임금의 마음을 알고 귀국 길에 선물하리라 작정했다. 노(魯)나라와 제(齊)나라, 진(晋)나라, 정(鄭)나라 등 중국(中國: 당시 오나라와 월나라는 남쪽의 변방이라고 중국에 넣어주지 않았다)의 여러 나라에 들러 안영, 정자산, 양설힐 등 당대의 유명한 정치가들을 만나 널리 교유를 쌓았다. 귀국 길에 서나라를 다시 방문하니, 임금이 이미 죽은 후였다. 계찰은 그의 묘소를 찾아가 보검을 풀어, 나무에 걸어놓고 떠났다. 구두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당사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왜 그러느냐는 종자(從者)의 질문에, 마음속으로 이미 주기로 결정했는데 죽었다고 해서 어찌 뜻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계찰은 답했다.

이 고사(故事)로 인하여 ‘계찰괘검(季札掛劍)’ 즉, ‘계찰이 나무에 검을 걸어둔다’란 성구가 생겨났다. 마음으로 한 약속도 지킨다! 철썩 같이 다짐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참으로 어려운 행동이다. 계찰만큼은 못하더라도 입 밖에 낸 약속은 지키는 것이 사회생활의 기본이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팍타 준트 세르반다: pacta sunt servanda)’란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법률생활의 기본원칙인 로마법언이 되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의 변경이 있어야 하고 최소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껴야 한다. 더구나 만인을 상대로 하는 정치인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 점에서 문 대통령이 최근 최저임금 1만원의 대선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됨을 사과한 것은 잘한 일이다.

신라의 화랑들은 신의를 지키는 것을 목숨으로 했다. 사다함이 무관랑과 생사지교를 맺었는데 무관랑이 죽자 사다함은 슬피 울다가 7일 만에 자신도 죽었다. 중국 전국시대의 위문후는 오늘날 공원관리소장에 해당하는 우인(虞人)에게 모월 모일 모시에 행차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날 비는 따루고 대신들과 벌린 주연이 한참 무르익었으나, 문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외로 나갔다. 비가 오니 연기 통보하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일개 공무원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위(魏)나라에 천하의 인재가 모여들고 부국강병을 이룬 것은 당연지사다. 선진국 국민은 약속을 중하게 여긴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는 사회가 된 다음에 비로소 국민화합과 국가발전을 논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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