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최우선·부실없는 완벽 시공", 28개월간의 시행착오·교훈 발판
창립 10주년 맞춘 3기 조기 준공

포항 3기 준공을 알리는 포항제철소 정문 아치.
단군이래 최대공사였던 포항제철소 3기 건설은 규모가 컸던 만큼 악전고투와 시련도 뒤따랐다.

특히 1976년 8월에 착공한 3기는 마침 중동 건설붐과 국내 건설시장 확대로 건설인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공기 지연이 속출했고 포항제철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건설 비상(非常)’ 선포 등 강력한 대책을 강구했다. 또 당시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6,300억원이 투입됐고 매일 2만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됐다.
POCH-37포항 3기 건설 당시의 건설비상회의.

포항제철소 3기 건설과 조업과정에서 발생한 1제강 공장 화재와 발전 송풍설비 부실시공의 폭파는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겼으며 “포철(浦鐵)사전에는 부실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단호한 의지도 보여주었다.

1) 단군이래 최대규모 공사 - 공기 지연에 따른 건설비상과 악전고투.

‘공기 5개월 단축’이란 목표를 지키기 위해 직원들과 정신무장을 다짐하는 박태준 사장.

1973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72년부터 시작된 3차 5개년계획에서 철강, 기계, 자동차 등 6개 산업을 개발전략산업으로 삼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산업합리화위원회,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등을 설립하는 한편 철강 부문에서는 △포항제철의 생산능력을 103만 톤에서 1976년까지 260만톤, 1979년에는 700만톤으로 확장한다 △제2 종합제철을 국제규모의 단위제철소로 건설한다 △양 제철소를 주축으로 기존 철강공업을 계열화한다는 내용의 철강공업 육성책을 내놓았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철강재의 대량공급이 전제조건이었으므로 3기 사업의 추진은 정부의 제4차 5개년계획의 핵심사업으로 떠올랐다.

포항제철은 제철소의 최종규모를 1기 준공 시에는 500만 톤, 2기 준공 시에는 700만톤을 전제로 하여 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에 최종규모가 850만톤으로 확정됨에 따라 공장배치계획을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지의 면적을 늘리기 위해 형산강과 냉천의 유로를 변경하고, 원료 야드를 추가 조성하는 한편, 외항의 건설과 함께 도로를 이설했다. 형산강의 유로를 송도방향으로 400m 변경하여 43만㎡의 부지를 확보함으로써 3, 4기 소결공장과 코크스공장을 배치할 수 있도록 했고 동일한 종류의 제품공장을 가까운 거리에 두기 위해 1후판 공장의 동쪽에 2후판 공장을 배치하는데, 이로 인해 냉천의 유로를 옮겼고, 인덕 주택단지 전면의 국도를 옮겨 34만㎡의 부지를 확보했다. 또 3기 완공에 따라 생산량이 늘어나고 계속되는 건설추진에 따라 물동량이 증가할 것에 비하여 형산강에 교량을 하나 증설하고, 경주와 포항 간 도로의 노폭을 확장하는 한편, 산소공장 후면의 일부를 국도로 편입시키는 등 이미 배치된 설비의 주변에도 당초 계획을 수정했다.

외자는 전액 민간상업차관으로 조달했는데 일본으로부터 3억 3,600만 달러를 조달하고 나머지 차관은 미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서독, 벨기에 등에서 조달했고 정부의 설비 국산화 시책에 따라 회사는 3기 설비 전체 기자재 가액 4469억원의 22.6%인 1,008억원 상당의 기자재를 국산화했는데 이는 1기 설비 때의 94억원(12.5%)에 비하면 10배, 2기 설비 때의 250억원(15.5%)에 비하면 4배가 넘는 금액이다.

1976년 8월 2일 2제강 공장 착공 때 박태준 사장의 언급처럼 3기 설비는 1, 2기 설비공사 물량을 합한 것의 1.2배, 2기 설비의 2.5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물량으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될 것이라고 공사의 어려움을 전망하기도 했다. 그 어려움은 현실로 다가왔고 공기 지연에 따른 건설비상과 악전고투가 이어졌다.

2) 건설비상(非常)선포, 추석 명절은 현장에서.
출근길에 추석연휴 반납을 독려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는 모습.

포항제철은 공사비 절감과 국내 철강재 부족의 빠른 해결을 위해 3기 착공 8개월만인 1977년 3월 18일 당초 공기를 4개월 15일 단축,1978년 12월 15일 공사를 완료하기로 한 데 이어 1978년 2월 2 0일 이를 다시 15일 단축하여 같은 해 11월 30일 공사를 마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러나 착공때 예견되었던 여러 문제가 공사진행 중 속속 드러나 공기준수는 물론, 공사 품질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쳐 공정 및 품질관리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그 이유는 공사규모가 커 국내 건설업체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웠고 기존 1·2기 설비와의 간섭사항이 많았으며 중동 건설 붐과 국내 건설경기 호황으로 기능인력 확보가 어려웠다. 또 국산화 기기의 납품지연으로 공사품질이 미달되는 사태가 속출했기 때문.

1978년에 접어들자 전반적인 공정 지연 현상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고 박태준 사장은 즉각 돌관공사체제로 ‘건설 비상(非常)’을 선포했다.

1978 년6월 12일 건설비상을 선포함과 동시에 종합카운트다운에 돌입한다. 설비별로는 소결공장이 133일, 코크스공장이 140일, 원료처리설비가 163일, 산소공장이 116일, 석회소성공장이 133일을 각각 남겨놓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으며, 2제강 공장과 2분괴 공장은 164일의 잔여 공기를 남겨두고 각각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동원된 임원들은 설비별로 공정 진도를 일일이 점검하고 발생한 문제점을 검토, 분석하여 해결책을 강구하는 등 건설지원업무와 본연의 업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3기 건설 당시 회사들도 추석 때가 되면 근로자들에게 귀향휴가를 실시하는 것이 관례였고 특히 건설 근로자들은 일터를 떠났다가 다시 복귀하는 기간은 평균1~2주일 정도였다. 그러나 1978년 추석은 9월 17일. 이때는 3기 공사가 준공예정일을 불과 2개월 남겨 둔 때여서 공정상 추석 휴가를 실시할 경우 공기를 준수할 수 없는 상황.
추석 휴가 반납을 독려하는 현수막.
이에 회사는 궁여지책으로 추석 5일 전인 12일부터 과장급 이상 모든 간부 사원이 새벽 5시에 출근해 출입문마다 배치돼 2만여명의 건설 역군들에게 국가적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성묘 미루기, 성묘 후 즉각 복귀 등 ‘추석 휴가 반납캠페인’을 전사적으로 전개했다. 또 건설현장 곳곳에는 “번영 위해 바친 추석, 조상인들 탓 할 소냐” “현장에서 맞은 추석, 추억 속에 보람된다” 등의 현수막이 나붙었다. 결국 현장에서는 추석 당일 포항 죽도시장에서 구입한 최상급 제수상으로 차려진 합동성묘 제례를 지냈고 캠페인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추석 당일에도 38%의 건설 역군들이 현장을 지켰으며 사흘 만에 67%, 닷새 만에 100% 출근율을 기록했다. 현장 사람들 스스로가 그 소식에 놀랐다. 추석을 반납해가며 건설에 매진한 이 에너지는 고스란히 공기 단축의 큰 힘으로 충전되었다.
3기 건설현장에서 지낸 추석 합동제례.
마침내 포항제철은 이 같은 노력으로 3기 설비를 예정보다 5개월 앞당겨 착공 28개월만인 1978년 12월 8일 준공함으로써 조강연산 550만톤 체제를 출범시켰다.

특히 1978년은 창립 10주년이었기 때문에 3기 설비의 준공은 더욱 의미가 깊었다.

또 3기 설비 준공과 더불어 당시 전 세계 308개 제철소 가운데 단위 제철소로는 29위가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550만톤급 제철소를 보유한 11번째 국가가 되었으며, 총생산량 기준으로는 일약 세계 17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이 같은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건설 기간 28개월 동안 빚은 시행착오는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겼다.

그 가운데 △공정관리기능의 미흡 △설계자료 접수지연과 도면 불충분으로 인한 설계변경 과다 △건설업체의 공사품질과 안전관리 미흡 △국산화 기기의 납기지연과 품질 불량 △설비공급자 감독요원에 대한 관리와 지원 불충분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포항제철은 준공 이듬해인 1979년 2월 ‘3기 건설공사의 반성과 향후 대책’이라는 리포트를 발행해 이 같은 문제점을 꼼꼼히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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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웅 작가·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강공장 화재사고···매년 4월24일 안전의 날로 되새겨
제강화재사건

1977년 4월 24일. 포스코 50년 역사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한다.

포항 3기 설비착공이래 안정적인 조업을 해오던 포항제철은 이날, 창립 후 처음이자 최대사고인 제1제강 공장 화재사건을 경험한다.

당시 래들 운반크레인 운전공인 김병기 사원이 조업 중 졸다가 순간적으로 크레인을 잘못 작동하여 90톤에 달하는 쇳물(용선) 중 44톤이 전로 밖으로 쏟아져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쇳물이 전로 주변 설비로 흘러들어 케이블을 전소시켰고 공장 내의 불이 겉잡을 수 없이 번졌다.

포항소방서는 물론 대구와 울산의 소방장비까지 동원했지만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불길은 종일 타오르다 저녁 무렵에야 꺼졌다. 제강공장은 완전한 숯덩어리였고 포항제철소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고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인명피해가 없다는 것.

회사는 즉각 사고경위를 정부에 보고하고 4기 설비 차관도입문제로 일본에 체류하던 박태준 사장에게도 긴급 전화를 걸었고 곧장 사고수습을 위한 조치에 들어갔다. 일본의 설비공급사 기술진이 사고현장에 도착해 정밀진단 후 완전복구 하는데 3~4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진단했다.
제강공장 화재복구 본부.
그들의 예측대로 복구에 3~4개월이 걸린다면 회사의 큰 손실은 물론이고 더 큰 문제는 국내외 수요가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주어 신뢰도가 급하락할 뿐 아니라 당시 3기 설비 공사가 절정이어서 포항제철은 창업 이후 최고의 난관을 맞는다.
제강공장 화재로 긴급 고안된 밭고랑 주선기.

그러나 여기서 포항제철의 저력이 나타난다.박태준 사장은 일본 현지에서 설비사 기술요원들의 신속파견을 조치하고 귀국, 복구일정을 최대한 앞당기라고 관계자들에게 지시했다. 복구팀은 최단 시일 내에 복구를 완료하기 위해 전원 삭발까지 하고 하루 3만m의 케이블을 깔며 철야 강행군을 펼쳤다. 복구작업 진행 중에도 또 하나의 문제는 생산 차질. 2000여 종이 넘는 각종 제품의 생산이 지연되거나 중단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1고로와 2고로가 교대로 출선하는 방식으로 출선량을 조정하는 한편, 비상 조업반을 편성하여 1일 3교 작업으로 운용하면서 최악의 조업조건을 극복해나갔다.

그 결과 5월 21일에 3호 전로 복구, 5월 28일 밤에 2호 전로까지 복구, 당초 예정일인 7월 1일보다 33일 단축해 복구를 완료하게 된다.

1제강공장 사고는 분명 커다란 위기였으나 포항제철은 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회사의 저력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내부적으로 혼연일체가 되는 정신 자세를 가다듬었다. 포항제철은 창업 이후 매월 1일을 안전의 날로 정해 행사를 해왔으나, 이 사고를 계기로 매년 4월 24일을 안전의 날로 정해 그 날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부실시공은 80%도 폭파하라”
3고로 발전송풍설비 부실공사 폭파(1977.8.2)

오늘날 ‘포스코 신화’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은 예초에 부실시공을 용납하지 않았던 원칙 때문이다.

포항제철소 3기가 건설 중이던 1977년 8월 1일 공사현장을 돌아보던 박태준 사장은 전기실 발전송풍설비 앞에 걸음을 멈췄고 기초 콘크리트 구조물의 불량을 발견했다.

짧지만 단호한 두 마디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이 콘크리트 당장 폭파해!” “폭파하고 다시 해! 이렇게 불량하게 제철소를 지어 놓으면 쇳물이 제대로 나올 것 같아?”

박 사장은 완벽시공을 위해 80% 정도 진행된 구조물을 폭파시키기로 한 것이다.
3고로 부실공사 폭파후 콘크리트 파편.
제철소건설 현장은 북새통이었다. 형산강 석산 현장에서 폭약을 구해오고 포항경찰서에 폭파허가를 받는가 하면 폭약을 장전하고 폭파기사를 대기시켰다.

단 하루가 지난 8월 2일, 제철소 내 건설부문 현장소장과 부서장들을 모두 집합시킨 가운데 폭파식이 거행됐다.

설비공사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여서 공사관리에 난점이 많았다. 따라서 일부 시공현장에서는 공기에 쫓긴 나머지 공사품질을 소홀히 하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박태준 사장은 불량시공만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지는 불량 시공물의 폭파로 나타났다.

이는 회사의 건설공사에서 불량시공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으로, 부실시공 흔적을 발견한 다음 날인 8월 2일 폭파현장을 지켜본 모든 건설업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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