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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경북을 걷다] 9. 경주 남산 삼릉가는 길

푸른 숲길 따라 남아있는 신라의 '흥망성쇠' 역사 속으로

윤석홍 시인·도보여행가 등록일 2018년07월22일 20시30분  
삼릉 전경
서남산 가는 길을 걷기 위해 월정교에 다시 왔다. 이정표나 안내도에는 ‘삼릉 가는 길’로 표기돼 있다. 어느 나라든 건국이 있으면 패망이 있다. 신라도 기원전 57년에 건국해 기원후 935년 고려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사라졌다. 신라 왕의 탄생과 건국은 물론 패망의 흔적이 애잔하게 남아있는 길이기도 하다. 월정교-천관사지-오릉-김호장군고택-남간사지 석정-일성왕릉-양산재-나정-남간사지 당간지주-창림사지-포석정-지마왕릉-배리삼존불-망월사-삼릉-경애왕릉까지 약 8km 거리다.

삼릉 가는 길 표지석
△돌에 새긴 개성 있는 안내도

삼릉 가는 길은 대체로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어 햇볕을 피하기 어렵지만, 막바지에 지마왕릉과 태진지를 지나 숲길로 들어서면 인상적인 경주 남산 소나무 숲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삼릉 가는 길’ 방향으로 100m 정도 가면 갈림길이다. 모퉁이 돌에 새긴 ‘삼릉 가는 길’ 안내도를 살펴본 뒤 한옥 스테이 월정루 지나 왼쪽 수로를 따라가면 오른쪽 들녘 한가운데 발굴을 마쳤지만 어수선한 모습의 천관사지가 보인다.

신라 명장 김유신이 옛 연인 천관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가 살았던 집에 세운 절이다. 자신의 집으로 인도해왔던 애마를 단칼에 베어버리며 이별을 선언했던 결기는 비수가 돼 한 여자의 명줄을 끊게 한다. 가슴 시리고 애잔한 사랑의 향기가 피어났던 현장이다. 이처럼 사랑의 사연이 남아있는 천관사지 발굴을 마친 후 흩어진 잔재들을 모아 절과 탑도 세웠으면 한다. 안내문에 그려진 그림은 유치하기 그지없다. 천관사지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보면 남천과 반월성, 월정교가 눈에 들어오고 교촌마을 옆 김유신의 집 우물터인 재매정이 보인다. 부들과 억새가 가득한 좁은 길을 따라가다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오릉 방향으로 간다. 좁은 골목을 지나오면 탑리마을 이정표와 오릉 후문이 나온다.

오릉에서 본 맑은 하늘 풍경
△덕스럽고 아름다운 왕릉인 오릉

잠시 오릉에 들렀다 간다. 경주에 있는 왕릉은 연초록 생기로 가득한 5월부터 9월 말까지가 제격이다. 왕릉에 오면 죽은 자의 생을 통해 산 자인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왕릉은 아주 완만하고 부드럽다.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인 같다. 봉곳하게 솟은 능선이 아름답다.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와 왕후를 한곳에 장사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다니며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를 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사릉(蛇陵)이라고 한다”했고,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재위 61년 봄 3월에 세상을 떠나니 사릉(蛇陵)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모두 사릉원 안에 장사 지냈다”라고 했다.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지만,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오릉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답고 시각적인 절제미가 돋보인다.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본다. 신라 초기를 단단하게 자리 잡게 했던 왕들을 뒤로하고 대숲 가득한 길을 돌아가면 신라 시조 왕비 탄강지와 알영정이 나온다. 조그만 정각 맞은 편에 알영정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인적 없는 숭모전은 삼국의 시조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라는 세종(1397~1450)의 명으로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나라에서 주관하다 조선 후기부터 박씨 문중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오릉을 나와 조금 전 왔던 방향으로 가다 도로 건너편에 김씨 문중 삼형제가 3년 시묘살이를 하며 효로써 일생을 마쳤다는 삼효각이 보이고 멀리 남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릉 네거리에서 교차로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경주인성교육체험장을 지나면 식혜골 마을이다. 한여름에 마시고 싶은 시원한 전통음료인 식혜가 생각나지만, 절이 많았던 이곳에 식혜(識慧)라는 도승의 법명을 따라 지었다는 다소 싱거운 경로당 설명문을 읽는다.

돌담길이 예쁜 모퉁이 돌아 보이는 조그만 집은 무형문화재 107호 김혜자 누비장의 창작공간이고, 조금 더 가면 김호 장군 고택(월암종택)이 나온다. 삼릉방향 이정표 따라 논길 사이로 걸어가면 남간마을이 나온다. 예전에는 제법 오랜된 집들이 많이 있어 남산 언저리에서 가장 운치 있는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마구잡이 지은 집들로 인해 예전의 고즈넉한 모습을 잃은 이상한 마을이 됐다.

마을 교회 아래 신라 삼대 우물(분황사 석정, 재매정) 중 하나인 남간사지 석정(石井)을 본 뒤 일성왕릉으로 향한다. 마을 골목을 빠져나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계속 올라간다. 보광사 지나 길 좌우로 쭉쭉 벋은 소나무들이 혼자 외롭게 자리한 일성왕릉을 호위해주고 있다. 문무와 지혜를 겸비했고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라며 경제를 살찌웠던 왕이다.

잠시 생각에 잠기다 내려와 남간사지 당간지주로 가지 말고 신라 최초 왕인 박혁거세 탄생 설화지인 나정(羅井)으로 내려간다. 발굴 정리가 끝났지만, 소나무 몇 그루 위로 하늘은 푸르게 펼쳐지고 구름은 표현하기 힘든 색깔로 물들어 천 년 전처럼 알을 깨고 나올 것 같은 신령스런 분위기다.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양산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
△신라 최초 왕궁터인 창림사지와 비극의 장소 포석정엔 적막감이 감돌고

왔던 길을 다시 올라와 보물로 지정된 남간사지 당간지주로 간다. 남간사지가 언제 만들어지고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9세기 초까지 절이 존재했다고 문헌에 전해진다. 개망초꽃이 만발한 길옆에 당간지주만이 외롭게 남산을 향해 서 있다. 시멘트 농로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창림사지 가는 길이 보인다. 발굴작업 때문인지 새로 길이 나 있다. 푸른 나무 사이로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창림사지 일대가 신라 최초 왕궁터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최근 복원을 끝낸 창림사지 3층석탑
멀리서 본 창림사지 3층 석탑 모습
최근 복원된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위용을 드러낸 채 서 있다. 탑 아래는 발굴작업으로 주변이 어수선하다. 창림사지에서 내려오다 삼릉 가는 옛길 이정표 따라 내려오면 멀리 낮은 담장 너머로 포석정이 보인다. 숭례문이 우리나라 국보 1호이고, 포석정은 사적 1호다. 평일 포석정은 언제나 그랬듯이 적막하다. 전복을 엎어놓은 모양 같다고 해서 포석정(鮑石亭)이라 했다.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우고 유흥을 즐겼겠지만, 남산의 신에게 제사 지냈던 신라의 별궁이라는 의미로 포석사(鮑石祀)였다고 한다.
포석정
927년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끝으로 신라 왕조가 끝나게 되는 비극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포석정 주차장 중간에 있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솔숲에 둘러싸인 지마왕릉이 나온다. 역시 왕릉은 솔숲 사이에 놓고 봐야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왕릉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다. 예전 길 옆에 있던 탱자나무는 베어냈는지 보이지 않는다.
배리삼존석불
작은 연못인 태진지를 지나 짙은 그늘로 가득한 숲길을 더 걸어가면 삼불사 주차장과 배리삼존불 오르는 길이 나온다. 삼불사 입구에 세워진 세심단속문(洗心斷俗門)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을 씻으라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배리삼존불 세 부처는 얼마나 복스럽게 생겼는지 보는 사람들을 웃음 짓게 한다. 보호각이 없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호각에 갇혀 햇빛을 보지 못해 웃음을 잃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가까이에 망월사(望月寺)가 있다. 달을 바라보는 절, 참 좋은 이름이다. 절 안에 세워진 작은 육각형 대명전 건물 안에 선덕여왕 위패를 모셔 놓은 것이 특이하다. 여기서 왼쪽으로 300m 정도 가면 삼릉(三陵)이다. 가는 길 중간에 있는 공동묘지가 발길을 우울하게 한다.

일성왕릉
지마왕릉
△소나무 숲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삼릉

삼릉 솔숲은 장관이다. 1991년 태풍 글래디스와 크고 작은 폭설로 소나무들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직사각형의 삼릉을 둘러본다. 북쪽에서 보면 탄력 잃은 중년 여인의 젖가슴 마냥 힘이 없어 안쓰럽게 보이지만 반대인 남쪽에서 보면 탄력 넘치는 팽팽함이 느껴진다. 여기서 사실상 ‘삼릉 가는 길’은 끝나지만 가까이 있는 경애왕릉까지 간다.
경애왕릉 가는 길
경애왕릉은 비참한 치욕의 죽음만큼 초라했지만, 솔숲에 자신의 존재마저 숨기고 말없이 근신하듯 자리한 왕릉의 아련한 분위기가 적막감마저 들게 한다. 살아서 신라 천 년을 욕되게 했지만 덕분에 천 년 넘게 사람의 침범을 막아 숲을 이뤘으니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것은 삼릉과 경애왕릉 주변이 사적지로 지정돼 보호받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며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탄생과 패망의 흔적을 더듬으며 신라인의 위대한 정신과 숨결을 혼자 사유하며 걸어볼 만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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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윤석홍 시인·도보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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