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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사람이 못하는 일은 시간이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로 제겐 들립니다. 물론, 도무지 ‘바로 잡혀질’ 낌새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런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라는 뜻이 우선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바로 잡힐 것이니 힘들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꿋꿋하게 제 살길, 제 할 일에 매진하라는 격려와 다짐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젊어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시간만 흐른다고 무엇이 변하겠습니까? 그냥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굳이 ‘시간이 한다’라는 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 언젠가는 하늘과 신령이 도와주는 날이 올 것을 믿으라는데 도통 믿음이 가질 않았습니다. 힘을 모아 아등바등 덤벼들어도 될까 말까 한데 난제를 젖혀두고 그저 제 할 일만 하면서 시간만 보내면 된다고 하니 그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못하는 일은 시간이 한다’라는 말은 어김없는 진리였습니다. 멀리 나라의 역사를 살펴도 그렇고 가까이 수십 년 동안의 저의 인생 도정(道程)을 반추해도 그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좀 살아보니 알겠습니다. 도저히 힘에 부쳐 해결책이 찾아지지 않던 것들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제 자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제 신상(身上)도 그렇고 집에서 아이들 키우는 일이나 밖에서 사람 만나는 일도 그렇습니다. 매번 쉽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모두 제 자리에 와 있습니다. 한 번은 제 3자들의 문제에 얽혀서 터무니없이 억울하고 난감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일인데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난세에 이득을 취하는 자, 떡고물 챙기는 자, 굿이나 보고 잿밥이나 챙기는 자, 밀정이라도 되어 보신(保身)하려는 자들은 넘쳐났습니다. 아, 이럴 때구나, 제겐 “사람이 못하는 일은 시간이 한다”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게 하나씩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침묵하고 외면했던 사람들이 곧잘 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냥 하는 말입니다. 같은 시간 속에서 함께 했다면 누가 가해자고 누가 희생자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다만 두려웠을 뿐입니다. 그게 보통사람들의 삶이기도 하고요. 그들은 시간이 자기편이 될 때까지는 침묵합니다. 시간의 명령이 떨어져야 움직입니다. 문득 얼마 전에 다시 본 ‘암살’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일제강점기 때 활약한 독립군들의 이야기입니다. 사건 전개, 인물 설정, 화면 구성, 메시지 전달 등 어디에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명작은 몇 번씩 봐도 감동과 재미가 새롭습니다. 못 본 장면이 새로 보이기도 하고 못 들었던 대사가 새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16년 만에 밀정을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안옥윤(전지현 분) 등 독립군들에게 변절자 염석진(이정재 분)이 하는 변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해방될 줄 몰랐지. 해방될 줄 알았다면 밀정을 했겠나?”, 총을 맞고 죽기 직전에 그는 그렇게 말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 “일본이 망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종종 듣던 말이었습니다. 결국 사람은 두 부류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못하는 일은 시간이 한다’라는 말을 믿는 이와 그 말을 믿지 않는 이가 그들입니다. 그 말을 믿으면 언젠가 꼭 좋은 세상을 보는 것이고, 그 말을 믿지 않으면 평생 좋은 세상 없는 세상에서 살다 가는 것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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