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에서 창조한 포스코 신화 광양만으로 이어가다
1980년에도 철강재 공급부족이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포항종합제철은 4기 사업에 착수한다. 포스코는 당초 1975년 5월 3일 포항제철소를 850만톤 규모로 확장하기 위한 3기 사업계획을 작성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은 바 있었는데, 1976년 이 사업계획을 수정하여 550만톤 규모는 3기 사업으로, 850만톤 규모는 4기 사업으로 분리했다.
4기 사업의 기본방향이 있었다. △소요되는 투자비중 외자는 차관으로 조달하고 내자는 최대한 자체 조달한다 △설비는 자원절약형으로 한다.△건설공사로 인해 기존 설비의 정상조업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한다. 등이다. 또 조강 기준으로 연간 91만톤까지 고급강 생산이 가능토록 하고, 설비확장에 따른 오염물질배출량의 급증에 대비하여 공장 주변 환경보존을 위한 공해방지설비를 설치하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설비 국산화와 지역사회에 대한 환경투자를 시작했다.
건설에 소요되는 전체 기자재 중 국산화 기기의 비중을 1기 12.5%, 2기 15.5%, 3기 22.6%로 높여가며 국내 관련 산업의 발전을 촉진해왔는데 4기에는 기자재의 35%를 국산화하기로 했다.
건설공사는 종합착공 9개월 전인 1978년 4월 28일 단일 공장으로 국내 최대 규모이며 4기 설비 총건설물량의 약 30%를 차지하는 2열연공장의 착공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어 같은 해 5월 1일 2후판공장의 확장공사를 시작하고, 6월 1일에는 선재강편공장의 확장공사를 시작한다. 구내운송ㆍ검정설비ㆍ공작정비공장은 4기 설비 중 가장 늦은 1980년 2월 29일 착공했다.
뿐만 아니라 공정단축의 전통을 익히 경험한바 있는 설비공급자들과 국내제작업체들이 기자재공급에 대해 미리 철저히 대비함으로써 비교적 원활하게 설비와 기자재를 공급할 수 있었다.
1981년 2월 18일 오전 10시, 포항제철소는 4고로에 화입 함으로써 조강연산 850만톤 체제를 가동하며 세계 11위의 단위 일관제철소를 완성하게 된다. 850만톤 체제의 완성으로 국내 전체 조강생산능력은 1210만톤으로 증가하고, 철강자급도는 조강 기준으로 89%에 달하는 역사적 의미를 포항 4기 준공이 가져온 것이다.
2) 회장제 도입, 박태준 초대회장 취임
포항 4기 설비 종합준공 직후인 1981년 2월 정부의 법령개정으로 포스코는 ‘정부투자기관’에서 제외되어 ‘정부출자기업체’로 남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포스코는 같은 해 2월 28일 정기주총에서 상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정관을 고치고 회장제를 도입하여 주주총회와 이사회의 의장을 회장으로 하고, 자본과 자본금 총액 내에서 사채를 발행할 수 있게 하며, 이사의 임기를 3년에서 2년으로 조정했다.
이 같은 정관변경에 따라 신설된 대표이사 회장에는 박태준 초대사장이 선임되고, 후임 사장인 제2대 사장에는 고준식 수석부사장이 선임되어 1981년 3월 2일 정식으로 각각 취임했다.
3)‘제 2제철 사업’ 이슈의 태동
포항제철소 외에 제2 종합제철 공장건설이 첫 거론된 시기는 포항 1기 설비가 한창 건설 중이던 1972년 2월이었다. 이 ‘제2종합제철구상’은 당시 재계의 영향력 있던 호남정유의 서정귀 사장이 중심이 되어 국제경쟁단위인 연산 500만톤 규모의 제2종합제철을 삼천포에 건설한다는 것.
이 구상은 공기를 3년으로 계획하고, 제품의 60%인 300만톤을 수출한다는 전제 아래 총 소요 자금을 약 7억 달러로 추정, 그 중 4억5천만달러는 유럽 6개국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으로부터 설비차관형식으로 도입하고 나머지 2억5천만달러는 현금차관으로 들여와 운전자금 등으로 사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제 2제철 건설 안에 대해 일반적 국민 여론은 수출시장 전망이 불투명하고 기존 건설 중인 포항제철소의 확장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어서 당시 이 구상은 외면받았다. 하지만 1973년 1월 초 상공부는 ‘장기제철소건설계획’을 수립했는데 이 계획에 연산 500만톤 규모의 제2종합제철건설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포항 1기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도 치사를 통해 포항제철의 1ㆍ2차 확장공사와는 별도로 제2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라고 밝혀 정부의 의지를 공식 확인 할 수 있었다.
제2종합제철은 1974년 9월 한국종합제철로 상호를 변경하고 미국 피츠버그의 U.S 스틸과 80대20의 합작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구체적 추진단계에 들어가자 양측은 견해 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제2제철 건설될 무렵에는 석유파동이 낳은 경제침체로 급기야 정부는 ‘중화학공업건설계획’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결국, 1975년 3월 김종필 국무총리는 관련 부처장, 한국종합제철의 태완선 사장, 포항제철 고준식 부사장 등을 참석시킨 가운데 회의를 열어 제2제철사업은 포항제철 550만톤 체제 완성 후 1978년께 추진하고 한국종합제철은 해산, 포항제철에 흡수 합병시킨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렇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제2제철사업은 1차 석유파동이 마무리되어 가던 1977년에 다시 추진되면서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상공부는 제2종합제철을 건설하기로 하고 1978년 중 실수요자를 선정, 1979년부터 공장건설에 착수키로 한다. 이와 관련 1978년 3월 21일 포스코가 정부에 예비사업계획서를 제출하자 현대도 다음날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우선 울산에 300만톤 규모로 제철소를 짓고 최종 1천만톤 규모의 제철소를 경북 영덕군 영해에 짓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존 공기업인 포스코와 민간자본을 대표하는 현대가 가장 유력한 실수요자 후보로 본격 경합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논쟁은 각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으며 정부 내에서조차 양측의 견해로 갈라져 있었다. 제2 종합제철을 두고 포항제철과 현대측의 경쟁은 팽팽하고 했다.
포항제철은 1978년 4월 1일 창립10주년을 계기로 각 언론에서는 제2제철 실수요자선정에 대해 포항제철의 입장을 지지하는 논조가 많았다.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열린 1차회의에는 박태준 사장과 김정렴 비서실장, 이희일 경제제1수석비서관,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 등 4명이 참석하는데, 이 자리에서 제2제철을 현대 측에 양보하라는 권유도 있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2차 회의에서 박태준 사장은 40여 분간에 걸쳐 제2제철 실수요자가 누가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소견을 피력한다.
정부는 1978년 10월 27일 마침내 제2제철 실수요자를 포항제철로 확정하고 10월 30일 이를 발표했다. 이날 최각규 상공부장관은 제2제철 실수요자 선정결과를 발표하면서 제2제철 입지에 대해서도 “실수요자인 포항제철이 최종 조사하되 그 결과를 검토해 정부가 1979년 초까지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지루했으나 양측이 사운을 걸고 팽팽하게 맞서며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제2제철 사업자선정은 이렇게 결말을 내렸다.
포항제철은 1981년 2월 18일 포항4기 준공으로 영일만의 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영일만에서 창조한 포스코 신화를 광양만으로 이어가는 일이었다. 바다를 메워 제강-연주-열연공정을 직결한 최신예제철소를 건설하는 광양만의 역사 역시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때부터 세계 철강업계의 시선도 관망에서 경계와 견제로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