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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문인협회장
문경시 마성면이라고 하는 작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한 권의 책으로 엮기 위해 염천(炎天) 속으로 현장답사를 하고 있다. 현재 사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드론을 띄워 마을 전경을 담기도 하고 곳곳에 남아 있는 산신당과 고목, 우물들을 사진으로 담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적는다. 그러면 거기에 얽힌 수백 년 지난 이야기들이 아직까지 고스란히 전해 오는 것을 보면서 오늘 염천 속에서 하고는 일이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그중에 마성면 늘목마을 진성 이씨 주사댁에서 귀중한 기록물을 발견했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었지만, 급속히 살라져 가고 있는 세태에 보기 드문 기록물이 아닐 수 없었다. 중학교 여자 동창생 아버지가 남긴 것이어서 더욱 다정하기도 했다.

나에게도 이런 종류의 기록물이 있었다. 아버지가 남기신 일기와 편지였는데, 20여 년 전 이사 하고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나서 찾아보니 아뿔싸 모든 것이 사라진 뒤였다. 그것이 늘 마음에 뭔가 끼인 듯 찜찜했는데, 이번 동창생 아버지의 기록물을 보니 그 아쉬움이 더 컸다.

친구 아버지의 기록물은 장손에게 남긴 집안 비망록이었다. 족보를 요약한 계보도와 장손에게 남기는 글이 맨 앞에 일러두기로 기록돼 있었다. 장손의 절대 책임과 준(準) 책임, 노목파(老木派) 공동책임을 기록했다. 모두가 조상을 돌보는 것인데 절대 책임은 장손의 고조부까지, 준책임은 5대조부터 7대조까지 큰집 아저씨들이 고국에 없으니 현실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고, 이 마을에 사는 그 아랫대 다른 자손도 책임이 있으니 같이 협의하여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8대조부터 12대조까지는 노목파 전체에 해당하나 이 마을에는 두 집 밖에 살고 있지 않고 그 후손 중 묘소를 아는 이들조차 드무니 이 기록을 잘 보존하여 묘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조상 산소의 위치와 그 조상들의 짧은 행장(行狀), 그 산소가 관리되고 있는 실태, 그에 딸린 위토(位土), 제사 지낼 때 상 차리는 법과 제사 지내는 법, 가산(家産) 등이 30여 쪽에 걸쳐 꼼꼼한 펜글씨로 적힌 것이었다.

그러면서 여자 동창생의 중학교 때 모습이 떠올랐다.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였던 그 모습이 40여 년이 지난 오늘 그의 아버지가 기록한 비망록과 겹쳐지면서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의류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 오빠의 증언을 접하니 더 보고 싶기도 했다.

퇴계 선생을 떠올리는 진성 이씨는 그리 많지 않은 후손들이 현재 살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 활동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높은 성씨 못지않다. 그중에 이곳 노목파는 퇴계 선생의 형인 온계 선생의 후예라고 기록돼 있다. 그 12대조부터 이곳에 입향했으니 1대를 30년으로 치면 360년이요, 25년으로 치면 300년이다. 그들은 집안에 전해오는 비기(秘記)를 따라 이거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했다. 늘목은 그들의 비기에 분명 명당임이 틀림없으리라.

마성면은 옛날 문경의 본거지였던 문경읍과 인접해 있어 이렇다 할 명문가나 번성한 문중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현장 답사를 통해 진성 이씨, 평산 신씨, 경주 김씨, 밀양 박씨, 동래 정씨, 전주 이씨, 영양 천씨, 영양 남씨, 충주 지씨, 예천 권씨, 안동 권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며 씨족공동체를 형성해 온 것을 발견했다.

그런 발견은 모두 기록에 의한 것이었다. 그 기록은 책으로도 있고 비문으로도 있고 서찰로도 있고 팸플릿으로 있었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 우리도 어떤 형태든 많은 기록을 하고 산다. 문자메시지, 카톡은 물론이요, 블로그, 카페 등 SNS뿐만 아니라, 일기, 편지, 학교 공부, 사회학습 등 쉬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이 기록들을 얼마나 잘 보존하는지에 달려 있다.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신문에 끼인 광고 전단지까지 잘만 보관하면 모두가 역사가 된다. 역사는 기록이다. 나의 기록을 하찮게 여지기 말고 소중하게 보존 전승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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