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월항쟁 민간인희생자유족회 채영희 회장

대구 10월항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채영희 회장.
시간이 가면 기억이 흐려진다고 하는데 어떤 기억은 더 선명해지는 것도 있다.

그건 그 일에 대한 한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오후 4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채영희(74·칠곡군 왜관읍) 회장을 만났다.

이번 만남에서 그 당시 수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데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짐으로 남았다.

채 회장은 9일 대구시청을 방문해 가창댐 인근 수변공원에 위령탑 건립에 대한 협의를 가지기로 했다.

이날까지 오는데 인생 70여 년이 걸렸다.

대구 10월 폭동에서 사건으로 최종 항쟁으로 시 조례안 통과까지 인고의 시간이었고 투쟁의 과정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칠곡지역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채충식 선생의 장남 병기 씨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관련자로 경찰에 체포돼 형무소에 투옥됐다.

채 회장은 어머님을 따라 대구형무소에 면회를 간 기억을 되살리며 아버지는 그 후 행방불명됐다가 1950년 6·25 직후에 대구경찰서 경찰에게 강제 연행된 뒤 7월 보도연맹사건으로 가창면 집단학살사건 때 사망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대구 10·1항쟁은 1946년 10월 1일에 미 군정의 식량 공출과 배급에 불만을 품은 학생, 시민들과 9월 총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경찰의 강제 진압에 반발해 일어난 저항사건으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됐다.

일제하에서 사회·정치 구조가 해방과 더불어 변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해가 걸린 미 군정과 그들의 후원을 받은 보수적 친일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되고 있다.

2010년 3월 대한민국 진실화해위원회의 ‘대구 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는 해당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 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 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채영희 회장이 그동안 모은 신문 스크랩을 보여주고 있다.
채 회장은 “보도연맹 학살 등으로 돌아가신 분이 113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그 당시 학살에 현장을 지켜본 관계자가 양심선언으로 처참했던 학살현장을 증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미망인이 모진 고통의 시간을 견뎌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됐다.

그들은 돌비석에 자기들 남편, 아들들 이름 석 자 새기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한다.

채 회장은 “국가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했음에도 친일파를 등용하고 미 군정의 잘못된 식량정책에도 불구하고 쌀을 달라고 외친 굶주린 백성들을 가두고 죽였다”며 “늦었지만 7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가해자는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고 진실규명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의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교과서를 정확히 기술해야 하고 추모사업과 배·보상 등 국가의 후속조치 역시 조속히 이뤄지기를 유가족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태정 기자
박태정 기자 ahtyn@kyongbuk.com

칠곡 담당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