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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건 국민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지난 7월 4~6일 개최된 제25차 싱가포르 아세아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 회의는 변화된 한반도의 정세를 주요 의제로 다루었다. ARF는 신뢰구축 증진, 예방외교의 발전, 분쟁해결 모색 등 3단계 추진방식에 따라 역내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아태·지역 최초의 다자안보협의체이다. ARF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Ministerial Meeting)는 ARF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연 1회, 매년 7월에 의장국의 수도에서 개최되며, 역내의 안보정세 및 ARF 발전 방향 등을 중점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ARF의 의사규칙은 ASEAN의 규범과 관행을 기초로 하며, 의사결정은 표결로 하지 않고 합의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2018년 현재 ARF에는 ASEAN 10개국(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브루나이,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을 비롯해 대화 상대 10개국(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유럽연합), 기타 7개국(북한, 몽골, 파키스탄, 동티모르,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파푸아뉴기니) 등 총 27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6일 채택된 ARF 의장성명에 따르면, 외교장관은 관련 당사국에게 ‘판문점 선언’과 ‘북미 공동성명’의 충실하고도 신속한 이행을 결의하는 동시에 북한에게 ‘완전한 비핵화’와 ‘추가적인 핵·미사일 시험 자제’ 등을 촉구했다. 주목할 것은 5일 오전까지도 의장성명 초안에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비가역적인 비핵화(CVID)’가 포함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용호 북한 외무상과 비비안 발라크라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의 만찬 이후 CVID가 삭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몇몇 참여국들은 인권 관련 문제를 포함한 다른 미해결 현안들의 해결을 위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설 준비가 돼 있음을 적시하는 문안을 성명에 담기도 했다. 이는 ARF 의장국인 싱가포르가 북미정상회담 주최국으로써 대립·갈등보다는 대화 국면을 유도하기 위해 한반도 정세의 변화에서 북한의 입장과 달라진 정치적 위상을 배려했다고 판단된다.

ARF 외교장관 회의에서 북한은 그동안 소원해진 ASEAN 국가들뿐만 아니라 관련 회원국들과의 관계 복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북한은 대부분의 양자 회담을 먼저 요청하고 당사국에 북미정상회담을 토대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완화, 경제협력, 미국과 종전선언 필요성 등을 설명하는 등 광폭 외교를 보였다. 특히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의 양자회담에서 한반도 관련 전략·전술적 협동 강화 방안과 전통적인 친선 관계를 더욱 확대 발전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 논의에서는 양측이 한반도 정세와 비핵화 로드맵을 의제와 최근 종전선언 채택을 놓고 북미 간 이견을 보이는 외교적 사항들의 향후 대응 방안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에 대한 북한의 외교적 행보는 냉소적이었다. 의장국 주최 만찬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먼저 이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다가가 공식 회담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남북 ‘외교장관 회담에 응할 입장이 아니다’라며 완곡히 거절했다. 이러한 북한의 반응은 종전선언 논의 부진, UN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유지 등과 같은 일련의 한국 입장에 대한 모종의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북미 간에도 공식 회담이 없었다.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가 3일 러시아 은행 1곳과 중국과 북한의 법인 등 북한 연관 ‘유령회사’ 2곳, 북한인 1명을 제재 리스트에 추가하는 등의 독자 제재를 가한 것과 폼페이오 장관이 ASEAN 국가들에 선박 대 선박 간의 불법 석유 환적을 전면 차단할 것을 포함한 모든 제재의 엄격한 이행을 공개적으로 밝힌 미국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북한은 미국과 한국의 외교장관 회의를 거절하고 대신 중국을 포함한 ASEAN의 이념적 사고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긴밀한 양자적 대화 채널을 구축하였고, 이를 통해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물밑 외교전에 공을 들였다. 그 결과 ARF 의장성명서에 북한이 원하는 문구가 채택됐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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