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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경 변호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던 자야(본명 김영한)는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기증하여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사찰로 바뀌었다. 자야는 시인 백석을 사랑하여 백석과 살림을 차려 동거까지 하였으나 백석 부모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였고 백석은 결국 다른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다. 백석은 얼굴이 잘생겨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여성들에게 미남으로 유명한데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으며 자야(子夜)라는 이름은 중국 고대로부터 노래 잘하고 사랑스런 여인을 일컫는다.

백석은 결혼한 후에도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하였으나 자야는 자신이 백석의 앞길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여 거절하였고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났다가 분단과 전쟁으로 북에 남게 됨으로써 둘은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백석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하였으나 1957년 아동문학 논쟁이 벌어질 때 계급적인 요소를 강조하기보다 아동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이 옳다고 주장했다가 ‘낡은 사상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고 집필금지와 함께 압록강 인근에서 노동자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대원각은 원래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여조카 김소산이 운영하던 요정이다. 김소산은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가 사랑했던 여인인데 1949년 김소산은 여간첩사건으로 오제도의 손에 의해 직접 구속되었다. 김소산은 수감되면서 그 당시 새끼 기생이었던 자야에게 대원각의 책임 및 관리를 맡겼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혼란한 와중에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 당시 국회부의장 이재학의 애첩이 되었던 자야가 이재학의 도움으로 1955년 대원각의 소유권을 자신 앞으로 넘겨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 북에 남거나 월북한 천재시인으로 백석 외에 정지용, 이용악 그리고 시인 임화가 있다. 이들의 시는 냉전시대 남한에서 판매가 금지되었다가 1988년 이후 해금이 되었다. 시인 정지용은 작품 ‘향수’에서 보듯이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를 이미지즘적으로 표현해 시를 발표하여 1930년대 한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군림하였으나 전쟁 중 북으로 가다가 비행기 폭격을 받아 사망했고, 시인 이용악은 시인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시인인데 일제하 만주를 떠돌던 조선 민중의 아픔을 생생하게 그린 리얼리즘적 단형서사시에 북방의 호방한 서정까지 담아 시를 발표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서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어용시를 발표하며 살았다.

‘조선의 랭보’라 불리던 시인 임화는 사회주의 문학운동을 표방한 단체인 카프의 서기장을 지냈으며 카프문학을 주도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임화는 시인 백석 못지않은 수려한 외모로 엄청난 미남이었고 영화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하여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임화는 1935년 카프가 해산한 후에는 잠시 순수문학으로 회귀하는 듯했으나 박헌영을 만나면서 남로당 노선을 따르게 되었고 1947년 박헌영이 미 군정의 체포령을 피하여 월북할 때 함께 북으로 넘어갔다가 1953년 한국전쟁 실패의 책임을 지고 박헌영과 남로당 당원 2000여명이 숙청을 당할 때 임화도 미제 간첩의 죄명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하였다.

시인 백석과 월북시인들은 분단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대한민국이 아니라 공산주의 북한을 선택하였다.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청산도 제대로 되지않고 지주와 자본가 등 부르주아지가 이끄는 대한민국 보다는 노동자, 농민 등 프롤레타리아가 이끄는 북한이 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자신들의 조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들은 대한민국의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아니라 그들이 조국이라 여겼던 북한에서 그들의 수령 김일성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집필을 금지당하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어용시인으로 살아야 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좌나 우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살 수 있었던 당시의 엄혹한 현실에서 만약 시인 백석이나 이용악 그리고 임화가 북을 선택하지 않고 남을 선택하여 남한에 남았다면 그들의 시인으로서의 삶은 어떠했을까. 지조론으로 유명한 시인 조지훈처럼 최소한 지조를 지키며 살 수는 있었을까. 대원각을 둘러싸고 시인 백석과 자야 그리고 김소산, 박헌영, 시인 임화로 이어지는 인연의 실타래가 질곡의 한국전쟁만큼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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