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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예술행위에서) 표현의 자기종속성 혹은 주체의존성은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객관적 계기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좋은 표현일수록 더 높은 객관화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고, 자의적인 요소는 표현과정에서 최소화된다.”(문광훈, ‘심미주의선언’) 모든 예술작품은 그 무엇을 그려내든 자화상일 뿐이지만, 좋은 작품일수록 보편적인 감동의 계기를 소장(所藏)하고 있어서 시간과 공간을 두루 포괄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는 설명입니다. 꼭 예술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표현은 어떤 수준에서든 반드시 자기반영적인 요소를 띠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메시지만 따로 떼어내어서 수신(受信)하면 예기치 않은 오독이나 오해를 초래할 때가 많습니다. 그 메시지가 생산되는 맥락을 알아야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팩트 폭격’이라는 것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맥락 일절 무시’의 무지막지한 언어폭력인 경우가 흔합니다. 어쨌든,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관과 객관을 넘나들면서요.

자화상과 버킷리스트라는 제목을 내걸고 표현의 주체의존성이니 의사소통의 맥락의존성이니 딱딱한 개념어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특별히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자 해서도 아닙니다. 며칠 전 어릴 적 친구들과 만나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얼핏 들었던 생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화두가 마침 그것들의 참견을 불렀던 모양입니다. 근자에 읽은 게 그런 것이었으니 도리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주제와 관련된 사건 개요는 이렇습니다. 친구의 친구(생면부지의)가 책을 한 권 냈습니다. 그 책을 가져와서 한 권씩 나누어줬습니다. 자전거 하나만 가지고 태평양 건너 미국 대륙을 두 달간 누빈 이야깁니다. 저 같은 약골 입장에서는 대단한 ‘인간 승리’였습니다. 일단 그 체력과 의지가 부러웠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그런 도전 정신을 겁 없이 몸으로 표현(실천)해 낸다는 게 감탄할 만했습니다. 대체로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이런 일을 왜 하지?”라고 물었습니다. 모두 여덟 명이 둘러앉았었는데 순간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한 친구가 “그렇게 인생을 정리하는 거지”라고 말해서 그 침묵을 깨뜨렸습니다.

또 하나가 있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 재미없던데?”, 이번에는 한 친구가 저를 지목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직장 일이 바빠서 자주 못 보던 친구였습니다. 아마 언젠가 이 지면에 실렸던 제 글(‘작은 숲이 그리워질 때’)을 보고 하는 말인 것 같았습니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그저 이것저것 해 먹는 이야기만 영화에 잔뜩 나오던데 그게 왜 재미있다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집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이웃들의 사랑과 자연이 준 선물들 덕분에(그것들을 차곡차곡 챙기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내는 게 보기 좋지 않았느냐고 대답했습니다만 별 설득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자연주의 영화에 이야기(드라마)가 표나게 들어오면 오히려 더 재미가 없을 거라고(한국판이 좀 그랬습니다) 덧붙였습니다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2부를 먼저 봐서 그랬나?”, 설명이 길어지는 게 부담스러웠던지 친구가 서둘러 그렇게 종결을 지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버킷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그런데 제겐 그런 게 없습니다. 있다 해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들뿐입니다.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는 자연친화적인 삶이나 제 이름과 함께 오래 기억될만한 작품을 쓰는 일은 이제 꿈속의 일일 뿐입니다. 의지도, 체력도 턱없이 힘에 부칩니다. 다행히 그런 것들을 이루고 사는 이들이 있어서 그들을 보며 꿈속에서나마 제 자화상 그리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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