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후세가 역사 옳게 기억했으면"

생존 애국지사 2인이 말하는 마지막 희망
안동출신 애국지사 장병하

전재용 기자 jjy8820@kyongbuk.com 등록일 2018년08월14일 18시01분  
올해 91세로 광복 73주년을 맞은 장병하 애국지사.
“철창에서 나오자 일본 경찰서장이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그때 정말 독립했다는 걸 느꼈다.”

1945년 8월 16일, 당시 나이 18살이었던 장병하(91·경북 안동 출신) 애국지사는 73년 전 광복 당시 상황을 꺼내며 눈시울을 붉혔다.

해마다 광복절을 맞이할 때면 하루 늦게 독립을 깨달았던 그 날의 기억 때문이다. 광복 당일 옥에 갇혀 기쁨을 나누지 못했던 장 지사는 동료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힘을 쏟기로 한 그때를 선명하게 그려나갔다.

학교생활의 시작은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외치는 것이었고, 수업은 졸업 후 일본군으로 보내려는 예비 훈련의 연속이었다. 징집으로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장 지사를 비롯한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차라리 일본 군대에 끌려가 죽느니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자”고 마음 먹었다.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이 구성됐지만, 거사는 쉽지 않았다. 단원들은 한자리에 모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학생 세 명만 뭉쳐 돌아다녀도 순사나 형사가 따라붙는 시대였다. 단원들을 이끌 단장마저 없어 거사는 더디게 진행됐다.

안동농림학교 졸업생이자 제자를 가르치던 유시승 선생을 단장으로 추대했으나 협력만 약속할 뿐 단장 자리는 거절당했다. 결국, 단장 없이 안동농림학교 학년별 주동자를 세워 거사를 준비했다. 8회 졸업생 권현동·윤동일, 9회 황병기·이감용, 10회 서정현까지 장 지사가 밝힌 당시 거사 계획의 우두머리다. 이들을 필두로 단원들은 거사를 준비했고 한 명 한 명 따로 만나 계획을 알렸다.

마침내 1944년 12월 무기를 탈취해 무력 봉기를 일으키고 악질 일본인 타살과 친일파 응징, 방송을 통해 시민의 권리를 찾아 만세를 부르는 계획을 세웠다.

거사는 이루지 못했다. 안동농림학교 5학년(10회 졸업생) 학생들이 조기 졸업하면서 차질이 생겨서다. 다음 해 2월 17일로 다시 잡은 거사도 무산됐다. 당시 평안도 겸이포 제철소에 취직한 8회 졸업생과 안동에 있던 9회 졸업생이 주고받은 편지 속에 조선독립회복연구단에 관한 내용이 검열에 걸린 것이다.
1945년 8월 16일 조선독립회복연구단 단원들이 옥에서 풀려나 해방기념 사진을 찍었다. 빨간 원으로 표시된 당시 장병하 애국지사 모습.
거사가 두 차례 무산되는 우여곡절 끝에 1945년 3월 10일, 일본군 기념일에 맞춰 날짜를 정했다. 장 지사는 “일본군이 행사와 함께 술에 취하면 일어나자는 계획을 세웠다.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확보하고 안동읍 사무소 시설을 점거해 방송하고 지원 부대가 오지 못하도록 전화선을 끊는 것까지 모든 준비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3월 7일부터 주동자급 단원들이 경찰에 잡혀 들어갔다. 사흘 뒤 지령이 내리도록 기다리는 단원들도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조선독립회복연구단 51명 전원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장 지사는 “일제 고등계 형사들의 사찰 능력이 탁월했다. 우리가 구속되면서 느낀 것이 사건 규모를 알고 관계된 사람의 주소와 동정까지 모두 파악해 잡았다. 그들의 정보 능력은 뛰어났고 몰랐던 우리는 잡히고 나서야 치밀한 계획하에 일망타진된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경찰서에 잡힌 단원들은 비좁은 유치장에 수용되지 못했다. 사무실에 긴 의자를 놓고 말굽 같은 수갑을 채운 뒤 5명씩 쇠꼬챙이로 끼워서 관리를 당했다. 옥살이는 더욱 심했다. 모진 고문의 연속이었다. 곡괭이 자루로 때리고, 기절하면 배를 눌러 토를 하게 만들고 끔찍했던 옥살이가 5개월 정도 진행됐다. 그러던 중 마침내 광복이 찾아왔다. 8월 16일 단원들은 모두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경찰서로 향한 장 지사 앞에 일본 경찰서장이 무릎을 꿇었다. 장 지사는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하고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장 지사는 그제야 만세를 불렀다.

장 지사는 “8월 15일에 바깥 길이 떠들썩해도 우리는 뭔지도 모르겠고 불시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해방됐다는 것인데, 우리는 일본 놈들이 우리를 처형하기 위해 속을 떠보려고 헛소문을 퍼트린다고 생각했다”며 “옥에 심부름하고 다니는 죄수들이 ‘해방이 됐습니다’, ‘당신들 풀려나갑니다’라고 하고 일본 간수가 울고불고해도 실감을 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안동농림학교 9회 졸업앨범 사진. 해방 이후 어수선한 당시 졸업사진을 찍지 못해 중년의 나이에 졸업생들이 모여 기념 앨범을 만들었다. 아래 빨간 원으로 표시된 증명사진은 장병하 애국지사 중년 모습이다.
장 지사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 난항을 겪었다. 독립운동가들 조사 기록이 통째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넘어갔고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몽땅 불에 타버렸다.

장 지사는 “반민특위가 당시 경찰 간부다. 일제 시대에 형사, 순사 했던 사람들이 경찰 간부, 서장을 맡았는데, 자기들이 처벌을 받는 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며 “부산 형무소로 가서 겨우 찾은 사건 검명부에서 찾은 자료는 독립유공 신청 단계에서 반려됐다. 독립운동 증빙이 어렵다는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세월이 흘러 1999년,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 포상을 주는 과정에서 서류가 다시 발견됐다. 소재가 확인된 30여 명에게 대통령 표창이 주어졌다. 장 지사도 공로를 인정받았다.

장 지사는 자라나는 후세가 역사를 옳게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6·25 사변은 알아도 나라를 언제 빼앗겼는 지 모른다는 것이다.

해마다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는 장 지사는 소망과 함께 만세삼창과 함께 외친다.

그는 “2년 전까지 대구·경북 생존 지사가 27명이었는데, 이제 3명만 남았다”면서 “아버지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후세들이 기억하고 나라를 잘 이끌어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 경북일보 & kyongbuk.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재용 기자

    • 전재용 기자
  • 경찰서, 군부대, 교통, 환경, 노동 및 시민단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