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자랑은 임청각이다. 임청각은 일제 강점기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 독립운동의 거점을 만든 석주 이상용 선생의 본가다. 임청각은 독립투사 열 분을 배출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성지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도 광복절 기념사에서 임청각을 “독립투사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했다.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를 비롯, 함께 간도로 갔던 당숙 이승화(애족장), 아우 상동(애족장), 봉희(독립장), 조카로 상동의 아들 운형(애족장), 형국(애족장), 봉희의 아들 광민(독립장), 친아들 준형(애국장), 친손자 병화(독립장) 등 고성이씨 집안에 아홉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추서 받았다. 여기에다 올해 광복절에는 석주의 손부 허은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돼 임청각의 열 번째 독립유공자가 됐다.

허은은 왕산 허위(대한민국장)의 의병투쟁을 도운 종질 허발의 외동딸로 종고모 허길은 이육사의 어머니다.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만주 영안현으로 간 허은은 1922년 16세 때 병화와 결혼, 고성이씨 진안의 종부가 됐다. 그녀의 반평생은 시조부 석주와 시부 준형, 그리고 남편 병화의 3대에 걸친 항일투쟁을 뒷바라지한 삶이었다. 허은은 1990년 태극기에 싸인 채 60년 만에 혼백으로 귀환한 석주의 유골을 눈물로 맞았던 독립운동의 증인이었다.

“독립운동 하는 어른들 뒷바라지 하다 귀국하고 보니 나라의 운명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친정도 시가도 양쪽 집안은 거의 몰락하다시피 되어 있었다. 양가 일찍 솔가하여 만주벌판에서 오로지 항일투쟁에만 매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허은이 귀국 후 독립투사의 며느리와 아내로 견뎌야 했던 만주에서의 모진 삶의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에서 이렇게 썼다.

나라를 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목숨을 내건 항일투쟁도 있지만 그들의 뒤에서 묵묵히 뒷바라지 한 여인들 또한 애국자다. 허은은 오죽했으면 “석주에게 추서된 훈장의 반은 그의 아내 김우락의 몫”이라 했을까. 허은의 뒤늦은 애족장 추서를 경하드린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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