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명문가-왕산 허위 선생

구미시 임은동에 있는 왕산허위선생기념관
국가보훈처는 지난 13일 만주에서 독립군의 항일투쟁 지원에 헌신한 허은(許銀)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허은 여사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구미시 임은동 출신 대한제국 의병대장인 왕산 허위 선생의 재종손녀이자 독립장에 추서된 안동 임청각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이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대한민국의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장을 받은 사람은 국내외 59명이지만, 그중 대한민국 국적자는 왕산 허위 선생을 포함해 25명뿐이다.

1990년 상훈법 개정으로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5등급이 됐다.

왕산 허위 선생 집안은 3대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 명문가로 현재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구미 4공단 확장단지 내에 왕산 허위 선생 3대 13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동상 설치 등 ‘왕산 광장’을 조성 중이다.
왕산허위 선생
허위와 허훈, 허겸의 동상이 앞에 서고 그 뒤로 허형, 허필, 허종, 허학, 허영, 허준, 허국, 허발, 허규, 허형식 등의 흉상이 배치될 예정이다.

방산 허훈은 왕산의 맏형으로 토지 3000두락을 매각해 동생들의 의병활동 군 자금으로 제공했다.

이후 청송으로 이주해 청송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성산 허겸은 왕산의 셋째 형으로 왕산과 함께 경기도에서 400여 명을 이끌고 의병활동을 했다.

또한 왕산의 아들인 조카 학과 만주와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부민단 초대단장으로 활동했다.

왕산의 장남인 허학은 왕산 사망 후 성산과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 중 일본군에게 체포돼 러시아에서 사망했다.

중산 허종은 방산의 손자로 독립운동 군 자금 지원으로 체포돼 2년간 투옥했다.

왕산의 사촌인 범산 허형은 오적 자살사건에 관계돼 옥고를 치르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범산의 동생인 시산 허필 역시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했다.
왕산 허위 선생 가계도
일창 허발은 범산의 둘째 아들로 만주에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했으며, 범산의 셋째 아들인 일헌 허규는 광복단 사건에 관계돼 옥고를 치른 후 광복을 맞아 귀국. 입법위원이 됐다.

허형식은 시산의 둘째 아들로 중국 동북 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1942년 7월 21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허은 여사는 왕산 허위 선생의 사촌 형 범산 허형의 손녀이면서, 허형의 차남 독립운동가 허발 선생의 딸이다.

왕산은 대한제국 때 의병장이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호로 1907년 항일 의병사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서울 진공작전을 지휘했다.

1855년 4월 2일 구미시 임은동에서 청추헌 허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896년 3월 김산(김천)에서 의병을 규합. 성주, 충청도 진천 등지에서 활동 중 고종의 명에 따라 의병을 자진 해산 후 청송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899년 벼슬길에 나서 5년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 승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이중 비서원승은 현재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할 만큼 높은 자리다.

1905년 외교활동을 위한 비밀 독일방문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일본만행규탄 격문 살포로 체포돼 4개월간 투옥한 후 벼슬을 과감히 내던지고 김천 지례에 은거했다.

1908년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 양주, 철원, 장단, 연천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해산당한 강화진의 관군까지 흡수. 전국 13도 연합의병 창의군을 결성했다.

군사장에 임명된 허위 선생은 서울 일제 통감부 공략을 결정하고 선발대를 지휘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후원군의 도착 지연과 일본군의 기습으로 패퇴했다.

이후 전국 13도 연합의병 창의군의 총대장에 오른 허위 선생에게 이완용은 사람을 보내 관찰사나 내부대신의 자리를 주겠다고 유혹했으나 선생은 이를 꾸짖어 돌려보냈다.

1908년 5월 24일 아침 연천에서 일본 헌병부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같은 해 9월 27일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로 교수형에 처해 순국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는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 선생과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날 같은 국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며“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 선생은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고 왕산 허위 선생을 흠모했다.
왕산 허위 선생 초상화
업적과 명성에 비해 정작 고향 구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왕산 허위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이던 2009년 구미시는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을 건립해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구미시 임은동 산 7번지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기념관은 부지 9717㎡, 건축 총면적 1950㎡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1층에는 영상추모관, 전시실, 회의실 등 허위 선생을 추모하고 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전시실에는 선생의 장손자가 보관하고 있던 선생의 건국훈장, 교지, 병풍, 만장,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또한 기념관에서 바라보이는 생가터에는 왕산 허위 선생 기념공원도 조성돼 있다.

하지만 생전 왕산 허위 선생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 알려진 왕산 허위 선생의 얼굴과 기념관의 흉상은 증손녀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린 초상화로 알려져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한편 허은 여사 애족장 추서 소식에 구미경실련은 왕산공원에 허은 여사를 추가해 ‘14인 동상’으로 보완할 것을 요청했다.

이어 “허은 여사 애족장 추서를 계기로 ‘대한민국 독립운동 최고 명문가’로서 왕산 허위 선생 가문의 위상이 재입증 됐다”며“구미시도 ‘왕산 허위 선생은 임은동 출신 독립운동가’, ‘장진홍 선생은 옥계동 출신 독립운동가’라는 식의 논리를 반성하면서, 왕산 허위 선생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허은 여사 외에도 1920년 3·1 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한 배화여학교 6명의 소녀 등 177명(여성 26명 포함)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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