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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64. 동해의 호국룡이 된 문무왕

백성의 고충을 헤아리라는 의상대사의 충고

윤용섭 전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 kingofsun@kyongbuk.com 등록일 2018년08월16일 21시08분  
문무대왕 수중릉.
강수(强首)의 글이 당 고종을 감동시켜, 김인문이 억류가 풀려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다. 문무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영륭(永隆) 2년 신미(辛未; 681)에 죽으니 유명(遺命)에 의해서 동해중(東海中)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대왕은 평시(平時)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숭하고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이에 법사가 말했다. “용은 축생의 응보(應報)인데 어찌 용이 되신단 말입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오. 만일 추한 응보로 축생이 된다면 내 뜻에 맞는 것이오.”

대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남산(南山)에 장창(長倉)을 설치하니, 길이가 50보(步), 너비가 15보(步)로 미곡(米穀)과 병기(兵器)를 여기에 쌓아 두니 이것이 우창(右倉)이요, 천은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다. 다른 책에는, “건복(建福) 8년 신해(辛亥; 591)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850보(步)다.”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덕왕대(眞德王代)에 처음 쌓았다가 이때에 중수한 것이다. 또 부산성(富山城)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마치고 안북하변(安北河邊)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를 갖추라고 명령하자 그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이 말을 듣고 글을 보내서 아뢰었다. “대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들은 감히 이것을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 하더라도 재화(災禍)를 없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 글을 보고 이내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인덕(麟德) 3년 병인 (丙寅; 666) 3월 10일에 어떤 민가에서 길이(吉伊)라는 종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총장(總章) 3년 경오(庚午; 670) 정월 7일에는 한기부(漢岐部)의 일산급간(一山級干)의 종이 한꺼번에 네 아이를 낳았는데 딸 하나에 아들 셋이었다. 나라에서 상으로 곡식 200석을 주었다. 또 고구려를 친 뒤에 그 나라 왕손이 귀화하자 그에게 진골의 지위를 주었다.

죽어서 정혼이 호국의 용이 되어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애국보민(愛國保民)의 정신이 숭고하며 거룩하다. 서울을 지키는 성을 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나, 백성의 고충을 감안하라는 의상대사의 충고와 이를 듣는 임금의 모습이 아름답다. 정교가 밝으면 땅위에 금을 그어도 백성이 이를 지키고 정교가 밝지 못하면 장성이라도 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의상대사의 지적은 오늘의 민주사회에서도 적용되는 지혜로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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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동

    • 김선동
  • 인터넷경북일보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