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더불어 심신 단련 학문연구 통해 인류애 실천

도산서원
한국의 서원은 400여 년을 지속해 온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 자산이자, 정신문화의 산실이자 예학의 산실이다. 나아가 겸손과 절제를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자연과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며 학문연구를 통해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한 자아 성찰과 자기 고뇌의 현장이다.

한국의 서원은 현재 600여 개가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서원 유산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잘 유지하는 곳은 많지 않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요구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갖춘 한국의 서원 9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서원’ 9곳은 내년 7월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등재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번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 재추진을 계기로 한국 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살펴본다.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편액
△영남 유학의 중심 ‘도산서원’ 퇴계의 향기가 베인 곳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유학자이자 선비의 전형인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퇴계 영정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7)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받음으로써 사액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중심이 됐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자리한 도산서원(사적 제170호)은 대한민국 대표 서원 중 하나로 꼽힌다. 서원 경내에는 동서재와 전교당(보물 210호), 위패를 모신 상덕사(보물 211호) 등 다양한 건축물과 약 400종 4000여 권이 넘는 장서와 장판, 그리고 퇴계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그가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퇴계는 일찍이 서원이 세워지는 곳은 존경받을 만한 선현의 일정한 연고지여야 하고, 동시에 사림들이 은거하여 수양하며 독서에 좋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물들은 한결같이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퇴계의 인품을 잘 반영하고 있다.
퇴계선생 문집
도산 자락 산수가 빼어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조건을 갖춘 도산서원은 성리학의 가르침에 의해 엄격하고 질서 있게 배치되었으며 이러한 건축의 특성은 절제되고 단아함을 보여준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1557년 57세가 되던 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해,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해 1560년에 낙성한 건물이다. 세 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인데, 서쪽 한 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한 칸은 그가 거처하던 완락재이며, 동쪽의 대청 한 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이다.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한 이곳은 퇴계 선생의 소박하고 절제된 건축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조선후기 화가 강세황은 도산서원이 성리학자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자연조건을 갖춘 곳에 세워졌음을 1751년 ‘도산서원도’에 표현했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이 1574년(선조 7) 봄 “도산은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서당 뒤에 땅을 개척해 조성했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1576년 2월에 사당을 준공하여 퇴계 선생의 신위를 모셨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진도문(進道門)이다. 진도문에 이르러 올라오던 길을 돌아서서 내려다보면, 남쪽으로 낙동강 물줄기를 가둔 안동호 일대로 시야가 넓게 펼쳐진다.

도산서원에는 여느 서원에서나 볼 수 있는 누각이 없다. 누각은 유림의 결집 장소로 서원에서 필수 장소이다. 이는 도산서원이 철저하게 퇴계에 대한 존양 서원으로 건립된 것일 뿐, 지방 유림의 양로회나 정치집회 등 정치성을 띠거나 단합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조선 정조가 직접 시행했던 ‘도산별과’ 재현
도산별시 백일장
도산서원에서는 매년 조선 시대 유일하게 지방에서 본 대과(大科)시험인 ‘도산별과(陶山別科)’ 재현 행사가 열린다. ‘도산별과’는 퇴계 선생을 참 선비로 추앙했던 정조의 뜻에 따라 1792년 시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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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필 퇴계종손이 공자종손에게 기념품을 전달하고 있다.

재현행사는 도산별과가 행해졌던 음력 3월 25일, 전국 한시 백일장으로 치러지고 있다. 전교당 한존재에서 먼저 고유를 하고, 이후 특설무대에서 정조의 치제문을 축관이 독송하고 별유사들은 치제문을 상덕사에 봉안한다. 이어 어제 게시를 위해 취타대와 파발대 행렬, 정조의 어제 개시, 과거재현행사 순으로 열리고 있다.

안동시는 도산별과의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고 이 지역에 전해진 전통적인 문화 자산을 꾸준히 발굴해 ‘감동의 문화자산’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서원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알리고 있다.
퇴계 16대 이근필 종손이 도산서원산비수련원 수련생들과 ‘종손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고 있다.
△‘퇴계정신’의 요람 도산서원

도산서원 입구에는 공자의 77세손 공덕성 박사가 1980년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돼 방문당시 남긴 ‘추로지향’(鄒魯之鄕)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휘호를 남긴 이후 30여년 만에 공수장 79세손이 다시 도산서원을 찾아 상덕사에서 참배해 공자와 퇴계 두 가문은 학문적 맥락뿐만 아니라 후손들 간 상호교류 교두보를 마련했다.

지난 2012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동양 오성(五聖)의 직계 후손 가운데 공자와 맹자 두 가문의 종손이 안동을 방문했다. 당시 유림에서는 이들의 안동 방문을 두고 ‘2500년 진객들의 안동 나들이’, ‘공·맹의 인(仁)과 퇴계의 경(敬)이 만나다’ 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에도 공자와 맹자의 종손들이 5년만에 안동을 다시 찾아 퇴계 종손을 비롯해 경북의 종손·종부를 만나 교류하고, 안동지역의 유교문화 현장을 둘러봤다. 이날 방문은 5년 전 첫 방문 때의 ‘공·맹가’와 ‘퇴계가’와의 교류를 넘어 한국이 지켜오고 있는 종가문화와 유교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청량산이 한눈에 보이고 부근에는 도산서원 계상서당 등 퇴계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에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이 지난 2001년 문을 열었다. 2002년 첫해 224명이던 수련생은 지난해 10만5000 명을 기록, 15년 만에 460배 이상 증가했다. 수련원 진입 입구 퇴계종택을 지키고 있는 퇴계 16대 이근필(86) 종손은 선비수련원 수련생들에게 ‘종손과의 대화의 시간’을 통해 퇴계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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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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