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 아내와 주문한 국밥을 한술 뜹니다

서로의 말투 같은 뚝배기엔
어젯밤 노동이 우거지처럼 담겨있습니다
뜨끈하게 지펴 오르는 김은
한 점 땀방울로 이마에 송글거립니다
켜켜이 묵은 책장 사이로 발효되지 못한 활자들이
와락, 한 톨 밥알로 목구멍을 채웁니다

수십 년 동안 부화하지 못한 지식들,
책꽂이 깊이 옹송거리며 동면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한 푼 두 푼 모아 찾아간 헌책방의 곰팡내와
낯선 이데올로기에 묻어난 매캐한 가스도 보였습니다
지난 세기의 잔해들이 그럴듯한 제스처도 없이
마스크를 낀 채로 결별을 선언하였습니다
종이박스에 몇 상자로 차곡차곡 재여
윤회할 채비를 갖추며 이른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일용할 한 끼 양식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감상) 제가 좋아하는 돼지국밥을 먹으려면 땀방울 흘릴 각오쯤은 해야 하죠. 노동과 땀방울이 있어야 뚝배기가 맛을 내듯이, 활자들도 발효가 필요하죠. 그런데 집구석마다 쌓여진 수많은 헌책들은 발효되지 못한 채 곰팡내와 낡은 이데올로기로 점철되어 있지요. 정말 현실과는 동떨어진 활자들이 나뒹굴고 있으니 답답함이 밀려오죠. 언젠가는 활자들이 따뜻한 국밥 한 끼처럼 환생하여 새벽을 비춰줄 날이 있을 거라 믿어요.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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