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_대구교대교수2014.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세월이, 없던 사랑과 지혜를 깜짝 선물로 가져다줄 때가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쌓인 경험과 식견들이 그런 화학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영화 ‘박하사탕’(이창동·2000)의 여주인공 문소리 씨가 tv의 한 프로에서 자신의 초기작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영화 ‘1987’(장준환·2017)을 만든 남편도 함께 한 자리에서였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씩 목이 메는 문 배우가 보기 좋았습니다.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라(감독이 빈천지교 고향선배라 더 그렇습니다) 보기가 불편했던 ‘박하사탕’의 장면 장면이 tv화면 속에서 해설과 함께 재연(再演)되면서 “이 영화가 명작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문 배우와 함께 목이 메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스무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지만 무엇인가 강한 동병상련을 느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출연자들의 대화에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씁니다.

에피퍼니(Epiphany·顯現)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문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이 말은 본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동방(페르시아로 추정)에서 별을 연구하던 동방박사들이 이상한 큰 별을 보고 그 별의 인도에 따라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베들레헴에 도착해 거기서 아기 예수를 봅니다. 그들은 황금, 유향, 몰약의 세 가지 선물로 지상에 현현한 신성(神聖), 아기 예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때의 에피퍼니는 신성이 공연(公然)히, 인간들의 세상에, 자신을 드러냄을 뜻합니다. 그와는 달리 문학에서는 ‘진리의 나타남(revelation of truth)’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주인공이 진부한 현실 속에서 갑작스레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나 그 계기를 의미하는 말로 주로 사용됩니다. 이 말을 유행시킨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자기 자신에게는 그런 에피퍼니의 순간이 매우 소중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자신의 작품에서도 이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명색이 전직 소설가인 저에게도 에피퍼니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어리고, 젊었을 때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서 만난 것들뿐입니다. 모든 만남이 그렇듯이 첫 만남이 가장 생생합니다. 귀동냥을 하는 자세로 어느 독회에서 뜻도 모르고 읽던 『장자(莊子)』가 갑자기 제 ‘무지의 뚜껑’을 열어젖혔습니다.

…인기지리무신(??支離無?: 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사람)이 위나라의 영공(靈公)에게 의견을 말했더니 영공은 그의 말에 아주 흡족해 했다. 그 뒤로는(그를 좋아하게 된 뒤로는) 영공이 보기에 온전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목이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다(而視全人 其?肩肩)….‘‘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

온전하지 못한 육체가 오히려 온전한 신체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말씀이 저를 막 흔들어 댔습니다. 좋은 뜻 하나만 전달하고 제 역할을 다하는 심상(尋常)스런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 이것저것들을 고구마 줄기처럼 일거에 끌어올렸습니다. 인간은 그가 어떠한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저 자신을 척도로 삼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인지상정(人之常情)의 불가피성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때 이후로 아마 열 권 이상의 책을 써서 출간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배우 문소리 씨를 tv에서 친견(親見)하면서(여태 한 번도 그녀의 말을 영화 밖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에피퍼니의 새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합니다. 세월이 에피퍼니입니다. 세월이 약이고 사랑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