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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일에 하와이 이민사회를 새겨본다

한정규 문학평론가 등록일 2018년08월29일 17시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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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규 문학평론가

1876년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조약을 체결 일제의 횡포가 심화되자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들 중 서재필이 최초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그 후 1902년에는 안창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들과는 달리 1903년 1월 13일 갤릭호를 타고 102명이 미국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갔다. 그 후 1905년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민자가 7,483명이다.

1904년 8월 1차 일조협약 후 일제가 실제 식민지 지배를 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미국 등지로 이민 독립운동을 했다.

그들 이민자와는 달리 이승만과 박용만은 항일운동단체인 보안회 쿠데타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잡혀 한성감옥에서 옥살이 마치고 출소이승만은 1904년에 박용만은 1905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갔다.

그 때 국내에서는 1904년 8월 1차 일조협약과 1905년 11월 2차 일조협약을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됐다. 그 협약으로 일본의 탄압이 날로 심해졌다.

국내 사정이 그러자 1905년에서 1907년 사이 노동계약기간이 끝난 하와이 호놀룰루 이민자 중 대부분이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로스앤젤레스와 중가주 등 미국 본토로 이주 하와이 노동이민자와 망명자 그리고 유학생들이 함께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하와이 노동이민자 중 독립운동에 가담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최정익 정재관 문양목 박장현 윤병구 민찬호 이강 장인환 전명운 이대위 장경 임준기 김성무 백일규 현순 안원규 홍언 정원명 임초 박상하 강영소 정원도 황사용 양주은 김현구 김종학 김형순 염만석 윤응호 등이 있다. 그들 외 망명 또는 유학생 중에는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신흥우 이종철 정한경 강영승 차라석 송종익 조병옥 송석준 정도원 김종림 하상옥 황사선 정영도 한장호 김현주 등이다.

1885년 4월 미국으로 가 살던 서재필이 1896년 한국으로 돌아 와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독립협회를 조직 했으며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은 당시 조선이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서울 현저동에 있는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웠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는 근대민주주의 시작이요, 만민공동회를 통한 국민여론을 수렴, 관민이 함께 모여 정부에 건의할 수 있는 토론 여론문화의 정치운동을 벌였다. 그러자 일본은 탄압을 강화했다. 그 때 서재필은 독립투쟁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1903년 안창호가 학문을 포기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미국 내 최초 한국인 단체였다.

그 2년 후인 1905년 10월 회원 35명으로 샌프란시스코에 한인공립협회를 창립발기 미주 서해안 일대 800여명이 참여한 9개 지회를 설립했다.

안창호는 또 리버사이드로 가서 직업소개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신보를 창간하고 미국 내 최초 노동자들의 기숙사 겸 한인촌을 건설 강습소를 세우고 예배도 보고 공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강명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은 리버사이드의 한인촌을 훌륭한 도산공화국이라 불렀다.

1913년 흥사단이 조직돼 미국의 한인사회와 중국 상해 그리고 조선에서 민족운동과 지도자를 양성 민족의 지도자로 나가게 했다.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주축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박용만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다. 박용만은 결국 중국에서 피살됐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이민자 중심으로 구성 된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지역 조선인독립운동과 한인사회의 구심점이 됐다. 국치일 8월 29일 다 함께 그 날을 되돌아보고 애국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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