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산업 이끌 최고 이공大, 30년 국내 최초 연구중심大, 미래 한국 과학자 발굴 주력
포항제철은 광양제철소 건설 직후부터 포항공과대학교 (포스텍)설립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포항제철이 포항지역에 4년제 대학 설립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때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1980년 광양제철소건설 계획 때부터. 이 무렵 박태준 제철학원 이사장은 포항과 광양 두 제철소건설 이후 고급두뇌 양성이 절박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수 인재들을 스스로 키워 국가발전에 공헌하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했다.
1985년 7월 대학설립추진본부를 확대 개편하는 한편 학사계획을 확정했고 마침내 7월 4일 문교부로부터 설립계획이 승인됐다.
△포스텍 (POSTECH)과 칼텍 (CALTEC)
또 포스텍 설립 초기 롤모델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설립될 학교의 모델도 찾았고 대학 설립을 전담할 조직도 포스코의 실무팀 중심으로 갖췄지만 초대 학장을 모시기는 쉽지 않았다.
마침 한 인물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1933년생 김호길 박사. 당시 52세, 경북 안동 태생, 서울대 졸업, 버밍엄대 유학,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 근무, 미국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교수, 전자고리가속기 권위자, 재미과학기술자협회 간사장과 회장 역임.
당시 실무추진반의 이대공 상무가 10여 차례 김 박사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김호길 박사는 1985년 6월 초 포항제철을 방문했고 박 회장과 독대 후 초대학장으로 낙점된다.
85년 8월 건설 기공식이 열렸고. 다음 차례는 해외에 있는 우수한 교수를 초빙하는 일이었다. 김호길 초대총장은 9월 중순 재외동포 교수요원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한 달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를 돌며 450명의 동포 교수 요원을 상대로 설명회를 갖는 대장정에 올랐다.
박태준 회장의 지원도 다각도로 이뤄졌다. 86년 1월 박 회장은 이정묵, 염영일, 김동환, 장수영 등 주임급 교수 초빙 대상자들을 뉴욕의 한 호텔에 부부동반으로 초청, 근무조건과 아파트, 학교 수준, 건학 이념 등을 솔직히 밝혔고, ‘조국을 위한 봉사’의 결단을 요청했다.
학교는 1985년 8월 기공 이후 12월에 1단계 건축공사에 들어가는데 최종 확정된 대학부지는 조선내화로부터 매입한 지곡주택단지 맞은편 동향산기슭 11만9000평과 국유지 1만6000평, 사유지 20여만평 등 총 38만 3천여평으로 늘어났다. 사유지 매입은 포항시와 위탁협약을 체결, 포항시가 매입하고 보상은 포스코가 부담하도록 했는데 보상과정에서 거주 주민이 이주를 거부하는 등 진통이 있었으나 대학의 설립이념을 이해한 지역경제계의 황대봉씨, 천신일씨 등의 협조로 잘 마무리되었다.
포스텍은 대학의 규모와 학생 수를 줄여 소수 정예로 대학과 산업체, 연구소가 유기적으로 협동하는 연구중심 대학을 가장 적합한 모델로 삼았다.
그 후 1994년 3월 1일 ‘포항공과대학’은 ‘포항공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학장’ 명칭도 ‘총장’으로 바꾸었다. 교명 변경 이후 공교롭게도 포스텍은 구조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김호길 초대학장의 급작스러운 서거와 대학 전담법인 출범, 산학연 협동구도 재편성에 이어 한편 대외적으로도 국내 대학시장이 외국에 개방되고, 입시에서도 교육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해 자율성을 위협했다.
그 가운데서도 학교는 국내 대학교육과 입시제도 개선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 개교 초기부터 산학연 협동체제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대학의 보유기술을 산업체 등에 적극 이전하여 국가 경쟁력 향상에 기여하며 한국의 기초과학과 첨단연구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 탁월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국민과 정부에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재인식시키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30년간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 대학으로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포스텍의 미래를 준비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치창출 대학’이란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했다.
그러나 포스텍의 큰 과제는 아직도 남아있다.
포스텍 교정에는 지금도 여섯 개의 좌대가 있다. 4개의 좌대에는 이미 임자가 있다.
아인슈타인과 에디슨, 뉴턴, 맥스웰의 흉상이다. 빈 좌대는 둘. ‘미래의 한국 과학자’를 모시려고 비워뒀다. 포스텍에 출신 과학자 중 노벨상을 받거나 그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이룩하면 그가 좌대의 주인이 될 것이다. 아직 그 좌대위에 임자는 없다
포스코가 포스텍을 세울 때 그 좌대의 주인공이 머지않아 나와 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세월은 30년을 넘기고 또 몇 해를 지나고 있다.
△박태준 설립이사장·김호길 초대학장 일화
1985년 2월 하순경, 대학을 세워야 한다는 박태준 회장의 결심에 따라 당시 이대공 포항공대 건설본부장은 대학설립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챙기고 있었다. 이때 박 회장은 문교부 고위직에 있던 친구로부터 김호길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 “정말 괜찮은 괴짜가 있는데 만나보겠나? 대통령에게 나라 이름을 ‘대한민주공화국’이라 하지 말고 ‘대한사기공화국’으로 바꾸라는 편지를 보낸 과학자가 있어.”
김호길은 영국 버밍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버클리대와 메릴랜드대로 자리를 옮겨 플라즈마에 관한 연구로 세계적인 업적을 쌓은 과학자로, 오랜 미국생활 속에서도 끝내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았으며 1983년에 LG그룹에서 설립한 진주 연암공전을 세계적 명문공대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영구 귀국했다.
그러나 막상 귀국하고 보니 연암공전의 공대승격 인가가 나지 않았다. 화가 난 그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일종의 ‘상소문’을 보내 전후 사정을 설명하며 우리나라는 ‘대한사기공화국’이라고 일갈했다는 것.
이때부터 박 회장의 지시로 이 건설본부장의 ‘10고초려’가 시작됐고 결국 김호길 박사는 1985년 6월, 포항을 찾게 된다. 박태준과 김호길은 첫 만남부터 거장답게 거침없는 언행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초저녁부터 한밤중까지 계속됐고. 학교 설립에 대한 대략적인 의견접근까지 이뤄졌다. 이날 첫 만남은 포항공대 설립에 대한 두 사람의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되었다.
박 회장은 김박사가 숙소로 돌아간 후 이 본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김호길 박사는 무조건 잡아야 해 ”
그리고 줄줄이 잡혀 있던 초대 학장 후보 면담 스케줄은 전면 취소되고 그렇게 1년 반을 준비한 끝에 드디어 1986년 12월 마침내 포항공과대학교가 문을 열게 된다. 그러나 7년여 후, 낭인생활로 외국에 머무르고 있던 박태준 회장은 생애 가장 가슴 아픈 부고를 듣는다. 1994년 4월 말 날아온 김호길 총장의 부음이었다.
△포스텍 개교의 초기 홍보
포항제철이 포스텍을 지방인 포항에 설립하고자 한 것은 한국과학기술발전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한다는 면과 함께 지방, 특히 포항제철의 연고 지역인 포항과 경북의 교육의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의도가 컸다. 따라서 포항제철은 포스텍 설립취지를 극대화 하기 위해 회사 차원의 홍보활동에 주력했다. 우선 세계 최고 수준의 교수진과 시설을 자랑하는 포스텍의 실상을 알리는 데 주력해 전국 각 고교와 교육프로그램에 홍보 책자를 보내고, 학생과 학부모를 함께 초청해 포항제철과 공대를 견학시키기도 했다.
설립 초기 포항제철의 홍보지원 노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효과를 발휘해 1986년 7월께부터는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학교에 대한 문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7년 1월, 원서접수를 마감한 결과 9개 학과 249명 모집에 모두 543명의 우수 인재 들이 응시, 2.18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으며 합격자의 학력고사 점수도 340점 만점에 전체 상위 2% 이내 수준인 300.6점을 기록하며 일약 명문대학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