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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규교대 교수

제가 사는 대구에는 도심 가까운 곳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산‘앞산, 범어동산’과 물(수성못, 신천)이 있어 좋습니다. 언젠가 서울에서 일박(一泊)하고 아침에 한강변을 산책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만족도가 수성못가나 신천변보다 훨씬 못했습니다. 서울사람들이 누리는 생활의 질이 지방보다 훨씬 못한 면도 많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40대 때는 앞산의 안지랑골에 있는 안일사 가는 길을 자주 올랐습니다. 안일사 약수터에서 물 한 잔을 마시고 내려오는 짧은 코스였는데 초입부터 절까지가 제법 가파른 산길이었습니다. 50대 때는 신천을 걸어서 용두방천(앞산 큰골 입구) 쪽으로 산책을 많이 다녔습니다. 그 뒤 아침산책을 못 나가다가 최근에는 가금씩 범어동산을 찾습니다. 경사가 완만해서 무릎이 약한 60대가 걷기에 좋습니다. 범어동산은 옛날부터 친숙한 장소였습니다. 고교 시절 이곳에 있던 친구 집에 놀러 왔었는데 집에서 수백 마리의 쥐를 키워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실험용 쥐였습니다. 지금도 그놈들의 찍찍거리는 소리가 귀밑을 맴돕니다. 한 번씩 그곳을 걸으며 “그 많던 쥐는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서울쥐, 시골쥐’라는 제목으로 다산의 유배지 생활에 대해서도 쓴 적도 있어서 쥐와는 약간의 인연이 있는 편입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인생의 황금기를 유배생활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헛되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학문 도약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특히 강진 유배 시절에는 많은 문도(門徒)들을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 전념하여 걸출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원시유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 연구를 통해 성리학적 사상체계의 한계를 돌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 이른바 일표이서(一表二書)가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늘 “학문은 우리들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중략’ 대개 사물마다 법칙이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배움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그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수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첫째로 선(善)을 막고 도(道)를 어그러지게 하는 화두가 있으니, 바로 ‘가도학(假道學)은 진(眞)사대부만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공부의 목표는 출세에 있다는 세간의 그릇된 인식).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요즘의 이른바 사대부란 곧 옛날의 군자다. 도학이 아니면 군자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므로 (아무리 과거에 급제해도) 사대부라는 이름도 얻지 못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다산이었지만 서울에 남아있는 자식들에게 말할 때는 좀 달랐습니다. 지금은 폐족이라 과거를 볼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볼 수 있을 터이니 어렵더라도 서울생활을 고수할 것을 두 아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피치 못하게 시골생활을 하게 되어도 서울 10리 안을 벗어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다산이 자식들의 시골생활을 한사코 만류한 까닭은 간단했습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어울려야 하는데 시골에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자칭 선비라는 자들이 도학자로서의 자긍심도 없고, 그저 목전의 작은 이해에만 목숨을 걸고 다투며, 남 잘되는 게 싫어 공연한 시기와 질투를 밤낮으로 일삼으니, 그들과 함께 하다 보면 결국 같은 금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젊어서는, 시골제자들에게는 도학을 강조하면서 자식들에게는 (과거급제를 포기하지 말고) 서울생활을 사수하라고 이율배반적인 말을 하는 다산이 좀 미웠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시골 서생원으로 살다 보니 이제는 다산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시골에 사람이 없기는 200년 전과 똑같습니다. 언제쯤이나, “그 많던 쥐는 다 어디로 갔을까?”를 한가히 읊으며 옛 일터 앞을 지날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합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 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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