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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조선 중기 학자 김정국(1485~1541)은 중종 14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을 두둔하다 삭탈관직 되어 지방으로 내려가 스스로를 팔여거사(八餘居士)로 칭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관직에서 쫓겨나 누가 봐도 궁색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에도 여덟 가지가 넉넉하다는 뜻의 팔여(八餘)라는 이름을 지은 데 대해 그는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하게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온돌에서 넉넉히 잠을 잘 수 있으며, 깨끗한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많은 양의 책을 넉넉하게 읽을 수 있으며, 또한 봄꽃과 가을 달을 넉넉히 감상하고,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히 들으며, 눈 속의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하게 맡을 수 있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이러한 일곱 가지를 넉넉히 즐길 수 있으니 팔여(八餘)임이 마땅하다고 했다. 이에 그의 친구는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어도 부족하고, 비단 병풍으로 둘러싸인 잠자리에 들고서도 부족하고, 진귀한 술을 마시고도 부족하고, 휘황찬란한 그림을 보고도 부족하고, 예쁜 기생과 잘 놀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며, 이에 더해 일곱 가지의 부족함을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며 친구의 오유지족(吾唯知足)의 삶을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김정국은 조선시대 중산층에 대해 “두어 칸의 집과 자그마한 논과 밭 그리고 두어 벌의 겨울 솜옷과 여름철 베옷, 서적 한 시렁과 거문고 한 벌, 햇볕 쬘 마루와 차 달일 화로 하나, 그리고 몸을 의지할 지팡이 하나, 봄볕 쬘 수 있는 나귀 한 마리 그리고 의를 지키고 도리를 어기지 않으며 나라의 어려운 일에 바른말 하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사회이기에 그가 말하는 중산층은 전체 사회 구성원을 대상으로 했다기 보다 아마도 양반층 가운데 중간 정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어쨌든 당시 중산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경제력뿐만 아니라 사회 그리고 문화적 수준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신분제가 사라진 지금의 중산층을 구분하는 기준은 어떨까?

몇 년 전 직장인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중산층은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2,000cc급 중형차 이상 소유, 예금액 잔고 1억 원 이상 보유 그리고 일 년에 해외여행 1회 이상 다니는 정도’의 사람들 집단으로 조사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기준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지는 않지만 당시 다른 선진국의 기준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확연한 의식의 차이를 보여 줘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 들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수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공분에 의연히 참석하고, 약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등을 중산층의 조건으로 삼는다. 영국에서는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불의, 불평등 그리고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등이 요구된다. 두 나라 모두 공통적으로 문화적 소양과 공동체 의식을 중산층 구분의 주요 요소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문화를 향유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결국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 아니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적 수준이 전부인 사회와 문화적 수준과 사회적 책임을 보다 강조하는 사회는 그 질적인 측면에서 결코 같을 순 없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선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고 약자에 대한 무관심은 소외계층을 늘릴 뿐이지만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사회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자존감을 높여 결국 개인의 삶의 질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개념이 오늘날 선진국들이 제시하고 있는 기준에 오히려 더 가까워 보이는 사실이 슬프고도 놀랍다. 질곡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단기간의 양적 성장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정작 질적인 면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결과일 것이다. 더 이상 늦지 않게 지금부터라도 삶의 질에 대한 진지한 논의에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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