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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2.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옥산서원

영남학파 선구자 이언적 선생의 선비정신 자계천 곡류에 그윽

황기환 기자 hgeeh@kyongbuk.com 등록일 2018년09월05일 17시06분  
옥산서원 전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달리다 보면 안강읍내가 끝날 때 쯤 오른쪽에 옥산서원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넓은 들판 가운데 곧게 나 있는 좁은 도로를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아름드리 소나무가 즐비한 풍성한 숲이 눈에 띈다.

이 소나무 숲 끝자락 오른쪽에 세월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한옥으로 이뤄진 사적 제154호 옥산서원이 있다.

안강읍 옥산마을 중앙에 위치한 옥산서원은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안강평야의 서쪽 자옥산 아래에 위치한 옥산마을은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요, 효행의 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남쪽으로는 무학산, 서남쪽으로 자옥산, 서북쪽으로 도덕산, 서원 뒤쪽으로 화개산의 4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회재가 유유자적하며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옥산서원
△세계문화유산 옥산서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에 포함돼 보호받고 있는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세상을 뜬지 20년이 지난 후에 창건됐다.

그가 타계한 후 1572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유림의 뜻에 따라 서원을 창건했으며, 1574년에는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그 현판 뒤에는 아계 이산해가 쓴 또 다른 현판도 걸려 있다.

옥산서원은 회재를 모신 사당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공간, 강학 공간, 서재 등 서원으로서의 형식적 공간을 갖고 있다.

정문인 연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가 있고, 강당인 구인당의 양쪽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강당 뒤쪽에 서 있는 것이 회재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이다.

동재의 오른쪽으로 지어진 여러 건물들은 서원의 살림을 맡았던 곳이다.

옥산서원의 제향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체인문, 체인묘, 전사청, 경각, 비각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강학 영역은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를 비롯해 구인당, 민구재, 암수재 등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무변루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이 쓴 것이다.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이 현판도 한석봉이 썼다.

구인당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옥산서원에는 지난 2월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를 비롯해 동국이상국전집 등 고서 4000여 권과 호구단자, 명문, 도록 등 고문서 1156건, 책판 회재선생문집 1123판 등 총 6300여 점의 무형 및 기록유산이 있다.

이들 유물들은 지난 2010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에 수장돼 있다.
안강유도회가 옥산서원에서 인성교육의 일환으로 소학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는 서원의 현대적 활용을 통해 전통과 현대문화가 접목하는 고품격문화 체험공간으로 재정립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옥산서원은 이를 통해 경쟁력 있는 문화체험공간으로 할용한다는 방침이다.
세심대
△회재 이언적의 생애와 사상.

옥산서원 앞에는 작은 폭포와 용소가 빼어난 경치를 이루는 ‘자계천’이 흐르는데, 이 자계천 가운데에 있는 너럭바위를 ‘세심대’라 한다.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란 의미를 지닌 세심대는 회재가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독락당을 지어 머물면서 붙인 이름이다.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회재 이언적은 경주 양동마을에서 출생해 24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중종 임금으로부터 중간자인 ‘언’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을 정도로 왕을 도울 수 있는 훌륭한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김안로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좌천된 후 고향인 자옥산 아래 ‘독락당’을 짓고 산수와 독서를 즐겼다.

후에 김안로가 물러나고 다시 기용됐으나 명종때 이기, 윤원형 일파의 모함으로 평안도 강계로 귀양 보내져 ‘중용구경연의’를 미완으로 남기고 유배지에서 63세로 일생을 마쳤다.
유림들이 향사를 맞아 옥산서원에서 재물을 감정하고 있다.
그는 기보다 이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이황에게 계승돼 영남학파의 토대가 됐다.

영남학파는 성리학의 한 학파로서 조선개국 공신인 훈구세력과 대립 관계에 있던 사림파중 16C 영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학파이다.

특히 영남학파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이언적은 주자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했고, 훈구세력의 부정부패에 대립해 정통 주자학에 입각한 유교사상을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이언적의 태극론은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였던 손숙돈과 조한보의 무극태극논쟁을 비판한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와 ‘답망기당서’ 4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주자의 이기론의 주리론적 견해를 수용해 두 사람을 비판하고, ‘이선기후설’과 ‘이기불상잡설’을 강조했다.

회재 이언적은 48세인 1538년(중종 33년) 청백리로 뽑혔다.

그는 잠언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했으며, 정통 성리학에 입각한 유교 사상으로 당시 부정부패한 훈구세력에 대항해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회재 이언적은 또한 유교적 국가주의에 입각한 이상적인 군주 국가론을 추구했다.

이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도덕적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한 군주의 직무 태도에 대해 그의 이런 신념을 담아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일강십목소’와 국왕이 덕을 쌓는데 필요한 8개의 항목을 올린 ‘진수팔규’에 잘 나타나 있다.

회재 이언적은 건축가적 자질도 뛰어나다.

그는 김안로와 심언광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된 후 고향에 내려와 ‘독락당’이라는 독특한 건축물을 남겼다.

독락당은 현실 세상에서 벗어나 은거하며, 자연에 융화된 그의 시대적 상황이 건축물에 그대로 묻어난 공간적 구성을 갖고 있다.

특히 자연과 하나된 공간 배치와 구조는 건축학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옥산서원 전경
회재의 건축물은 그의 시대적 부침과 결부된 건축물임과 동시에 뛰어난 공간 배치와 구조로, 그가 얼마나 뛰어난 건축가적 자질을 지녔는지 보여주고 있다.

최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자계천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방문객도 크게 증가하고 있는 옥산서원은 후학을 배출하는 전통 유교 교육기관으로 조선 후기까지 영남사림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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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환 기자

    • 황기환 기자
  • 동남부권 본부장, 경주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