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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유언

한정규 문학평론가 등록일 2018년09월10일 18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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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규 문학평론가
1906년 2월 1일 일제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 3월 2일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2월 7일 그라스키노에서 동의단지회를 만들어 하얼빈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3성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여순 일러 감옥 형장에서 조국을 뒤로 한 체 순국했다. 그가 사형집행이 된 그해 8월 29일 조선이 일본에 병합 주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 5분 전에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글을 써 남겼다. 그리고 그는 두 동생에게 ‘내가 죽으면 나의 유골을 하얼빈공원 옆에 묻었다가 조국이 주권을 회복한 후 조국으로 이장하기 바란다. 나는 천국에서도 국가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니 너희는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알려라. 모든 사람이 국가의 중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일심협력하여 실질적 업적을 쌓아라.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천국에 들릴 때 나도 춤추면서 만세를 외칠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런 그는 아직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하얼빈 그곳 어딘가에서 쓸쓸히 잠들어 조국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한 노력이 국민의 의무라 했으며 독립을 위해 마음을 함께하여 협력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천국에 가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을 하며 애국정신을 보여줬다. 그가 서거하고 36년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안중근 의사의 바램과 같이 조국이 독립했다.

그러나 조국은 독립의 기쁨도 잠깐, 이 땅에 소련 공산주의와 미국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동경 38도 선을 사이에 두고 충돌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중국이 개입 치열한 전투를 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60년이 훌쩍 넘도록 총칼을 겨누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갈망했던 조국의 독립은 분단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그의 영혼은 중국 이국땅에서 갈 곳을 잃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조국 땅으로 이장할 자손도 이 땅에는 없다. 자손이 없더라도 국가가 해야 한다. 그러나 여건이 녹록지 않다.

안중근 의사는 1894년 그의 나이 16세 때 김아려와 결혼 장남 분도 차남 준생 그리고 딸 현생을 낳았다. 장남 분도는 일곱 살 때 일본인 첩자가 건네 준 과자를 먹고 독살됐으며 나머지 가족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차남 준생은 친일 반역자로 변신 일본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애비라 칭하며 일본의 앞잡이로 살았다. 준생의 자손들은 미국에 거주하면서 잘살고 있다. 그렇다고 후손들에게 미룰 일이 아니라 국가가 그의 유언이 헛되지 않도록 외교적 역량을 발휘 그의 유해를 발굴해 국내로 안치해야 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은 그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그가 비록 한국인이기는 해도 민족주의를 벗어나 동양의 평화 더 나아가 인류의 안녕, 세계질서를 걱정한 사람으로 한 시대를 뛰어넘는 세계사적 인물임을 감안해 적극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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