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_대구교대교수2014.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그것이 알고 싶다’, ‘추적 60분’, ‘탐사보도 세븐’ 등과 같은 TV 탐사보도 프로를 보다 보면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성적인 접근으로는 도저히 설득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수단을 논하면서 에토스(화자의 인격과 신뢰감), 파토스(청중의 심리적 경향, 욕구, 정서), 로고스(논증, 논거 등 논리적 뒷받침)의 세 요소를 강조했습니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TV 탐사보도의 내용들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고삐 풀린 ‘파토스’를 ‘에토스’나 ‘로고스’로 분석하고 고발하는 것들입니다. 윤리적 관점에서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합법적인 욕망들을 고발합니다. 카메라는 욕망에 찌든 파토스가 인간을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초라한 것으로 만드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얼마 전에 본 한 TV 탐사보도는 모 종교 행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사람과 (그에게 기대서) 기적의 치유를 소원하는 다중(多衆)의 모습을 취재한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정도를 벗어난 ‘파토스’의 향연이라 할 만했습니다. 카메라의 시선이 에토스와 로고스를 바탕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면 그 파토스의 향연은 그릇된 것임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초자연적 현상을 매개로 인간의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기복(祈福)의 주술이 횡행했습니다. 그러나 종교나 정치적인 신념은 본디 파토스가 우세한 법입니다. 에토스와 로고스는 사후 합리화의 수단으로 존재할 뿐 파토스를 이길 수 없는 곳이 바로 그 영역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신념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신과 함께’라는 영화 제목을 빌려 저의 신관(神觀)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릴까 합니다.

인간은 환경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특히 공간적 환경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큽니다. 우리는 장소(場所)라는 용광로에서 태어나는 주물(鑄物)입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아야 제대로 영화감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학교에 가서 선생(先生)의 육성(肉聲)이 전하는 진리에 귀 기울여야 진정한 배움이 있는 것처럼, 신전(神殿)에서 두 손 모아 고개 숙여 신을 만나야 신앙심을 제대로 배양할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은 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고 통솔합니다. 신앙생활의 초입에 든 이들이 흔히 묻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중요한가, 사랑이나 수양이 중요한가?”, “선행(善行)이 중요한가(생활 중에서) 장소에 충실한 것(종교의식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가?”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질문은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웃에게서 ‘믿음과 선행’을 보기가 어려울 때 더 많이 나옵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그럴 때 저는 얼른 ‘공간’의 편을 듭니다. 논쟁을 부르는 공연한 설명은 피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성소(聖所)에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내면의 신성(神聖)을 양성하려면 신성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물론 저의 경험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말을 꺼낸 김에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그렇게 물으면, “신은 신전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부른다고 아무 데나, 혹은 가가호호, 함부로 나타나는 자는 신이 아닙니다. 신의 가면을 쓴 내 욕심일 뿐입니다. 신은 자신의 공간 안에만 있습니다. 그 공간 안에서,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이 그의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정기적으로 가내(家內) 공간 조정을 합니다. 제 방이 신전의 역할에 보다 충실해 질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그때마다 소망합니다. 공부의 신이든, 글쓰기의 신이든, 사랑의 신이든, 제가 신봉하는 신이 거기서 저를 기다려 줄 것을 소원합니다. 거기서, 언젠가는 ‘신과 함께’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