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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선생님은 남성 우월주의자 같아요. 한 수강생이 나에게 던진 말이다. 그럴 리가요, 불쑥 튀어나올 뻔했지만 대답을 미루고 잠시 생각했다.

그날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날이었다.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라는 부분을 지나면서 떠나는 사람을 말없이 고이 보내드릴 수 있다면 화자는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별을 맞은 시 속의 화자는 아직 대상을 사랑하고 있고 그것은 사랑이 끝나지 않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자세일지도 모른다고 해석했다. 그 말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최우선이라는 말로 옮겨졌고 결국은 배우자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수강생 대부분이 여성이고 연령대가 비슷한 분들로 구성된 수업이어서 어떤 현상에 대해 토론을 벌이면 동감을 하고 동조를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날은 내 의도가 조금 어긋났거나 내 표현이 적절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적잖이 당황한 내가 찾아본 내 변명은 무의식의 한 부분을 들춰보는 일이었다.

기억을 좀 거슬러 올라가자면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참 많은 헌신을 한 분이셨다. 약주를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 다음 날에도 따뜻한 밥상은 변함없었으며 특별한 음식은 어김없이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버지 꺼니 함부로 손대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기는 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그 무조건적인 아버지 모시기에 많은 분노를 느끼기도 했는데 결혼을 하면서 그런 사고가 자연스럽게 내 생활 속으로 쑤욱 들어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들딸을 차별한다든가, 남녀학생을 차별한다든가 하는 일은 내 기억으로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날 내 무의식에 있던 생각이 수업시간에 슬며시 튀어나왔던가 보다.

그런데 나는 정말 남성만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 날 나의 의견은 누군가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면 바로 내 옆 사람이 가장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것도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내 옆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도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기도를 올렸다. 밤새도록 하느님 한 번만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마침내 그는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의 옆에 누워있는 아내의 얼굴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분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남성우월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우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동경하고 닿을 수 없는 곳에 손을 뻗으려 한다. 그 머나먼 희망을 가지고 평생 가슴을 졸이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여, 이제 그만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로 하자. 잠시만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기로 하자. 바로 거기에 당신이 그토록 갈구했던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옆 사람을 우월하게 대접한다면 당신 또한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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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김선동 kingofsun@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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