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진 수필가
음력 8월 첫째 주 일요일만 가까워지면 들뜬다. 우리 평해 황가 16세손 석(石) 자 중(重) 자 할아버지와 광산김씨 할머니를 비롯하여 제25세까지의 조상님들 할아버지 40명 할머니 37명 모두 77명의 신위를 모신 합동 제단의 풀 내리는 날이다.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오곡리 산 50번지다. 700리길 예초기를 싣고 달려갔건만, 어제 내려온 서울 윤청 조카가 혼자서 이 넓은 묘역의 풀을 다 내리고 말았다. 고맙다! 우린 그 풀들을 거둬서 치우는 일만 하면 그만이다. 낫과 갈퀴만 잠시 제 몫을 한다.

유사인 포항 윤만 조카가 간소하게 차린 제수로 제를 올린다. 벌초 꾼 제관은 모두 12명, 조촐하다. 두어 집에서 못 온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포항 조카가 축을 고할 때는 신위가 하도 많아 한참이나 걸린다. 등에 모기 녀석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손자들 둘이 곁에서 이를 쫓느라 콧등에 땀이 맺힌다. 먹이가 이리 흔한데도 잠자리는 한 마리도 얼씬 안는다. ‘깍깍!’ 산골짝을 울리던 까마귀들 울음소리도 안 들리고 조용하다. 경건하여지라고?

초혼은 종손 석호 장조카가, 아헌은 나, 종헌을 재승· 영식· 성원 손주 셋이 함께 정종 잔을 정성 들여서 올린다.

묏자리 가운데 널찍한 곳에 자리를 펴고 2열 횡대로 마주 보고 앉는다. 정성껏 준비한 나무 도시락 맛이 맑은 공기와 어우러져 매우 향긋해 입맛을 한껏 돋운다. 제주는 금방 바닥이 나고, 정담은 ‘허허 호호’ 꼬리에 꼬리를 문다. 123살 부채꼴 백일홍 한 쌍이 참 정겨워 보인다는 듯 새빨간 미소를 가득 지으며 내려 다 보고 있다.

제25세손까지 여기 모셨으니 할아버지 산소에 별도로 안 들려도 되지만, 번연히 살아있는 손자로서 그럴 수는 없어 해마다 산소에 올라 풀을 내리고 제를 올린다. 올해도 맏아들 상대와 부산 조카 철호와 함께 숲에 들어선다. 오르는 도중에는 산소 3기가 있다. 풀을 내릴 때는 길이 뚜렷하게 나 있었다. 골 총이 되어선지 이젠 고라니는 물론이고 산 토끼조차 오르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숲이 꽉 우거져 있다. 산소는 몇 년만 지나면 나무와 풀들이 쑥쑥 자라서 산 바닥과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즉석 지팡이와 낫으로 푸나무를 헤쳐나가면서 헐레벌떡 찾아 오른다. 올여름은 하도 더워선지 거미 진드기 쐐기 같은 곤충들이 안 보여 편안하게 오른다. 어디로 가든 이산 맨 꼭대기만 오르면 할아버지께서 잠들고 계셔서 찾기는 어렵지 않다.

20분도 안 되어 할아버지 산소가 환하게 반긴다. 해마다 잡초는 늘 한두 자씩 자라고 있다. 둘이서 낫질을 해대고 난 뽑고 하니 곧 산소가 말끔해진다. 간단히 제수를 차리고 예를 올린다. 해마다 같이 올라와 같이 벌초를 하는 조카가 참으로 고맙다. 할아버지 산소는 송이 따러 다니는 이들의 길목인가 보다. 길이 확연히 나 있고 쉬다간 자취가 남아 있다.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십시오. 저희는 내년에 또 오겠습니다.”

내려가는 데는 길이 필요 없다. 아무 나뭇가지나 잡고 넘어지지 않기만 하면 된다. 쿵쿵 팔다리 운동 제대로 한다. 지팡이들을 산 들머리 소나무 곁에 꽂고 찻길 가에 나선다.

“수고 많았다. 부산까지 가려면 서너 시간 걸리겠다. 조심해서 가게. 강여사, 내년에 또…”

“네, 아재요 숙모님! 안녕히 올라가세요. 상대야, 잘 가”

아침나절에는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졌는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하늘 얼굴이 새파랗다.

국도 제88호선 백암온천로 배롱나무들의 긴 환송과 태백 준령 구주령 아흔아홉 구비의 쭉쭉 뻗은 금강송의 불그레한 환영을 받으며 구불구불 재미나게 달리고 달린다.

조상신들께서 차를 밀어주나? 내려올 때보다 훨씬 더 빠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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