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녁시간에,

거두절미하고,

괴강(槐江)에 비친 산 그림자도 내

명함이 아닌 건 아니지만,

저 석양―이렇게 가까운 석양!―은

나의 명함이니

나는 그러한 것들을 내밀리.

허나 이 어스름 때여

얼굴들 지워지고

모습들 저녁 하늘에 수묵 번지고

이것들 저것 속에 솔기 없이 녹아

사람 미치게 하는

저 어스름 때야말로 항상

나의 명함이리!





<감상> 만물이 솔기 없이 녹는 어스름 때야말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명함이 아닐까요? 자신의 명함에다 온갖 경력을 내세우는 작금의 세태에 어스름은 바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공(空)을 가르쳐 준다. 어슬녘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얼굴들은 지워지지만, 유난히 큰 소리가 보인다. 이때는 공기가 가라앉아 듣고 싶은 소리만 보이는 관음(觀音)의 순간이다.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외치는 소리는 들판에서 놀다가도 크게 들리지 않는가. 어슬녘 귓바퀴가 젖어야 들리는 이 소리를 나는 ‘나의 명함’으로 내밀어야 하겠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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