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의 전 대통령 차우셰스쿠는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반 나치 투쟁의 영웅에서 독재자로 전락한 차우셰스쿠의 몰락은 불과 1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뤄졌다. 몰락을 몰고 온 주범은 경제정책의 실패였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차우셰스쿠는 2차대전 당시 반 나치 투쟁으로 두 차례 투옥돼 국민적 영웅이 됐다. 1974년 대통령이 된 차우셰스쿠는 다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소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 독자노선을 걸었다. ‘동유럽의 이단자’로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찬사와 함께 경제적 지원도 듬뿍 받았다. 특히 프랑스와는 긴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에게 동티가 난 것은 집중적으로 추진한 중공업 정책에서였다. 세계적인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수출 위주의 석유화학공업에 치중한 중공업 정책이 수출 비용의 엄청난 증가로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석유화학 투자에 끌어들인 외채 150억 달러를 갚을 길이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정책 우선순위를 외채 상환에 두고 초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식량 원자재 등 무엇이든 간에 수출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수출했다. 국민은 희생과 인내로 고통을 분담, 영하 25℃의 강추위가 계속되는 데도 전력과 석유 공급이 제한됐다. 국민의 높아지는 불만을 누르기 위해 코드가 맞는 족벌체제를 구축했다. 쿠데타 위협을 막기 위해선 군대가 미덥지 않자 보안군에게 각종 특혜를 주어 자신의 친위대로 육성, 비밀경찰까지 두었다.

인권 옹호에 앞장서 온 개신교 목사 토에케스의 경찰 연행에 항의하는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이 무차별 발사,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5일 후 수도 부쿠레슈티 광장에 모인 수십만 군중은 차우셰스쿠의 퇴진을 외쳤다. 1989년 12월 27일 루마니아 TV 방송은 대통령 차우셰스쿠와 그의 부인 엘레나 부통령의 재판기록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방영하면서 두 사람이 비밀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고 발표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반등했다. 하지만 화해무드가 경제 실패를 덮을 수는 없다. ‘차우셰스쿠 현상’이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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