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가게 여자가 박스를 열어
몇 묶음째 상품을 보여준다

몸과 몸을 흩어 한 무리임을 확인시키지만
군집을 모르는 손님에겐 못 가본 바다 같다

멸치는 팔려서라도 돌아갈 물길이 없다

있다 해도 짓뭉개진 뒤에야 놓여날
그물망, 어제까지 안 그랬다고 여자가 말했다

은빛 파도에 떠밀려 파닥거리는 멸치를
채반째 데쳐 비늘이 생생하도록 바람에 널었으니

그물을 싣고 항구를 들락거리는 건 배의 사정,

장마 탓이지만 마침 그 때 일이 떠올랐을 뿐
머리를 떼면 흑연 같은 속셈이 딸려 나와

멸치는 곤곤해진다, 그러니 안주로 부른들 뭐 하랴

촘촘하게 엮인 투망을 덮어쓰는 절기에도
물기 다 거둔 멸치는 건건하다

비쩍 마른 여자가 삐꺽거리는 좌판에서 돌아선다

한 번도 제 영역을 지켜낸 적 없는, 멸치
저걸 덮치려고 고래까지 아가리를 활짝 벌린다





<감상> 멸치를 파는 여인은 꼭 멸치처럼 닮아 있군요. 최고의 상품(上品)이라고 박스를 열어 보이지만 흑연 같은 속셈이 딸려 나와 곤란한 처지에 놓이고 맙니다. 돌아갈 길이 없고 제 영역을 지켜낸 적 없는 멸치의 신세가 좌판을 지키려는 비쩍 마른 여자와 겹쳐지네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멸치를 덮치려고 아가리를 벌리는 고래라니! 이것도 남의 사정이라고 외면하는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정말 무서워지네요.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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