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선덕여왕 때 큰 절이 잇따라 세워졌다. 선덕여왕 3년(634)에 분황사가 건립됐고, 한해 뒤에 영묘사라는 큰 절이 완공됐다. 영묘사는 조각, 공예, 서예 등 여러 예술 분야에 천재적 재능을 발휘한 신라 당대 최고의 예술가 양지스님이 주관해 지었다.

삼국유사 ‘의해’편 ‘양지사석’조에는 양지라는 스님이 이 절의 건축을 주관했으며 절에는 찰흙으로 만들어 금물을 입힌 장륙불상과 천왕상, 그리고 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절에는 황룡사의 상과 같은 크기의 16자나 되는 장륙상을 만들었는데 곡식으로 2만3700석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이 영묘사에는 특이하게도 ‘옥문지(玉門池)’라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옥문’은 궁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것이어서 이 절의 실질적 설립자인 선덕여왕과 관련지어 이야깃거리가 될 소지가 많았다. 옥문지라는 이름은 절에서 직접 붙인 것이라기보다 그 모양이 여성의 성기를 닮아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왕의 5년 5월에 개구리떼가 왕궁 가까이에 있는 영묘사의 옥문지에 모여들어 울어댔다. 왕이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는 개구리 눈의 부라린 모습이 병사의 모습이라며, 왕성의 서쪽 옥문곡에 적병이 들어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는 선덕여왕 지기삼사(知幾三事) 중 ‘연못에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여근곡에 매복한 백제군을 알아낸 것’을 써 놓았다.

이처럼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절이다. 이 영묘사 터에서 발굴된 ‘신라 천년의 미소’로 불리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의 미소 띤 얼굴 주인공이 선덕여왕이 아닐까. 이 기와는 기와 틀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빚은 것으로 신라의 탁월한 심미성이 집약된 작품이다.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의 조화로움과 잔잔히 미소 띤 모습은 숙련된 장인이 아니고는 빚을 수 없는 걸작이다. 이 때문에 영묘사 장륙상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신라의 미켈란젤로 양지 스님이 ‘선덕여왕의 미소’를 형상화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여왕의 미소를 문화재청이 2일, 뒤늦게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