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원찰 소금강산 백률사 불상들…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등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 불상(백률사 진입도로변에 소재).
경주시청 근처 7번 국도변에 ‘소금강산(小金剛山·176m)’이 있다. 아름다운 산세와 기암들로 인해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산이다. 신라 불교 공인의 계기가 됐던 순교자(이차돈)의 넋이 어린 불교의 성지로, 명찰 백률사(栢栗寺)를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주 백률사 아래서 내려다본 석조 사면불상.
백률사 오르막에는 신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이 있다. 높이 3.5m 정도의 큰 바위 4면에 여러 개의 불상이 돌아가며 조각되어있는 소위 사방불(보물 제121호)이다. 삼국유사 3권, 탑상편 ‘사불산 금불산 만불산’ 조(條)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이 백률사로 가는 도중 염불하는 소리가 땅속에서 들려 파보게 했더니 큰 바위가 나왔다. 신령스런 땅이라 여겨 그 자리에 절을 짓고, ‘굴불사’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바위 서(西)면에 아미타 3존 불이 조각돼있고, 동면에는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좌상이, 북면에는 미륵보살과 11면 관음보살로 보이는 부처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남면에 서 있는 보살상은 당초 3구인 듯한데, 우측 하나를 떼어낸 것 같고, 그 두 번째도 머리가 훼손되어 존상을 알아보기 힘들다. 당시 신라에서 널리 신앙되었던 여러 부처들을 한 바위 둘레에 고르게 배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경주 백률사.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백률사에 보관하다가 1930년 국립경주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국보 28호인 중요 문화재로, 높이 약 1.8m의 상·하 전면이 금동채색으로 돼 있다. 양손이 결실되어 불상 전체가 허전하게 보인다. 넓은 어깨에 하체가 길고, 가슴 밑에 법의(法衣)가 U자형으로 선명하며, 두 다리의 굴곡이 뚜렷하다. 왼손에 약함을 들었던 것으로 전해와 약사여래로 보고 있다.
경주백률사 금동약사여래 입상(국립 경주박물관 소재).
소금강산 정상에 있는 마애삼불좌상이 있다. 백률사 대웅전 뒷길(등산길)따라 산 정상으로 오르면 동북향으로 있는 큰 암면(岩面)과 마주친다. 이 벽면에 세 가지 불상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 데, 중앙본존불은 3m 높이로 상호가 널찍하고, 좌우 협시보살은 2~3m 높이쯤 보인다. 두 불상 모두 삼도와 2중 두광을 하고, 본존을 향해 둘 다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게 특이하다. 두 불상의 존상이 뚜렷하지 않지만 화불과 정병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어 아마도 아미타 삼존불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9세기 후반 통일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주 백률사 이차돈 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소재).
백률사 이차돈 순교비는 높이가 1m 정도 되며 각 면의 너비가 약 30㎝쯤 되는 화강암 입석물이다. 국립경주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모두 6면인데 한 면은 그의 순교 장면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나머지 면은 명문으로 꽉 차있는 듯하나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 힘들다. 비석 그림에 손을 맞잡고 있는 이가 ‘이차돈’인 것 같다. 그의 목을 베니 흰 피가 한 길이나 솟아오르고 갑자기 하늘이 칙칙해지고, 주변에 꽃비가 내리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고, ‘삼국유사’는 그때의 상황 장면을 그럴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신라 법흥왕 때(527) 자기 목숨을 바쳐, 신라불교의 공인을 이룩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역사적 인물로 전해오는 사람이다. 그가 순교한 지 약 290년 뒤인 제41대 헌강왕 때(817)에 혜륭, 효원 같은 대승들이 주축이 되어 이 비를 세우고 무덤도 고쳐 쌓았다고 전한다. 이 비는 ‘이차돈 공양당(異次頓 供養幢)’이라고도 하며, 1914년 백률사에서 발견되었는데, 불교계의 순교상(殉敎像)으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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