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한 충신의 숨결 고스란히
하지만 1871년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65년 다시 지어 포은 선생을 복향하고 1990년대에 영천 유림이 합심해 국비지원으로 지금의 서원이 완비됐다.
현판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윤봉오 군수가 썼으며 신도비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만고의 충신 포은 정몽주 일대기.
정몽주 선생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 (圃隱),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시대 3장의 장원급제를 한 학자로 영천군 치소 동쪽에 있는 임고면 우항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1337(충숙왕 6년) 아버지 고려 수문하시중 운관 공과 어머니 영천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생은 성장하면서 세 차례 이름을 바꾼 설화가 있다.
먼저 포은 선생은 어머니가 임심했을 때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떨어뜨린 태몽을 꾸고 몽란으로 이름을 지어 9세까지 불렸다.
두 번째에는 9세부터 관례까지 몽룡으로 불리었는데 이씨 부인이 물레질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 사이 꿈에서 황금빛 비늘을 번쩍이는 용이 배를 따 먹으며 빙그레 웃는 모습에 잠이 깨어보니 몽란 또한 배나무에서 빙그레 웃으며 배를 먹고 있는 모습이 꿈 속의 용의 모습과 닮아 몽룡이라 지었다.
마지막으로 관례를 치를 즈음에 또 한 번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번에는 아버지 운관 공이 꿈을 꿨는데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 “나는 주공(周公)이다. 그대 아들 몽룡은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소중한 사람이니 잘 길러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꿈에서 깬 운관 공은 곧 관례를 치를 것이니 아명을 버리고 꿈속에서 주공을 만났다 하여 몽주(夢周)라 고쳐 부르게 했다. 아버지의 꿈에 나타난 주공(周公)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아우이며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인물로 성인(聖人)으로 추대하고 있다.
포은 선생은 19세 되든 해에 아버지 일성부원군 묘소에서 3년간 여막을 짓고 여묘를 행했다. 3년 여묘를 마친 선생은 21세부터 24세 되던 해인 1360년(공민왕 9년) 과거시험에서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삼장(三場)에 잇달아 장원으로 급제해 명성을 떨쳤다.
문과에 장원급제하며 벼슬길에 오른 선생은 성균대사성,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고 성리학이 고려와 조선에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389년 (공양왕 1년) 53세에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했지만 3년 뒤 1392년 조선 개국을 반대한 정몽주 선생은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죽은 뒤 9년이 지난 1401년 이방원이 조선 태종으로 즉위한 후, 정몽주 선생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손들은 개성 근처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고려의 충신이며 절개가 곧은 포은 선생을 고향인 영천으로 모시고자 계획했다.
태종 6년(1406) 아침 일찍 시신을 수습해 후손과 많은 유림의 선비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상여가 고향 영천으로 내려가는 도중, 지금의 경기도 용인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명정이 날아가 버렸다. 바람에 날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이상하게 여긴 후손들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는 보기 드문 명당’이라 하며 여기에다 시신을 모실 것을 권유했다. 후손들은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감탄하며 하늘의 뜻으로 알고 현재 위치(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에 모셨다.
이방원과 정몽주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와 ‘단심가’라는 시조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특히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1392년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한다. 이방원이 아버지인 이성계를 문병하러 온 포은 선생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술자리에서 하여가를 부르니 선생이 단심가로 화답하며 일편단심 충성심을 보였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단심가로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
성리학 의리정신을 몸소 실천한 사상가로서 조선 성리학 원조로 추앙될 뿐 아니라 충절의 상징이 되고 있다.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에서 ‘임’이란 표현이 있다. 이방원과 술자리에서 누군가 “임이 누구입니까?” 묻자, 선생은“임이란 나라일 수도 있고, 임금일 수도 있는데 그 모두는 하나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오니 이것으로 서로 갈 길이 정해진 것이다.
1392년 4월 4일 선생이 선혈을 뿌리고 죽은 선지교 돌 틈으로 하룻밤 사이에 푸른 대나무가 솟아났다.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를 본 사람들은 그 후부터 선지교를 ‘선죽교’라 고쳐 부르며 선생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서원 내 문화재
△임고서원 전적 10종 25책(보물 제1109호-1991년 지정)-서원에 소장된 전적들은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 약 200여 책이 있다. 이 중에서 지정된 것은 10종 25책이다. 이 책들은 임고서원이 창건된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서원의 운영과 구성 등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북도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62호 임고서원(1985년 지정)
△유형문화재 제272호 포은정몽주유허비(1992년 지정, 임고면 우항리)-포은 정몽주 유허비는 영천 출신 정몽주가 부모상에 각각 3년의 여묘를 지낸 것이 조정에 알려져 1389년(공양왕 원년)에 영천 군수 정유에 의해 정몽주가 태어난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 세워졌다.
포은유물관과 조옹대 야경. 영천시가 지난 2006년부터 임고서원 인근에 198억 원의 예산을 들여 임고서원 성역화 사업을 했다. 영천시가 지난 2006년부터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일원 4만7884㎡ 부지에 243억 원의 예산을 들여 유물전시관(포은 유물관), 생활체험관(충효관), 조옹대, 선죽교, 연못(용연) 등을 건립 또는 재정비했다. 589㎡ 규모로 건립된 유물전시관에는 성리학의 보급과 실천에 힘쓴 포은 선생의 일대기와 이름에 얽힌 설화, 포은 선생 문집, 임고서원 연혁, 소장전적 등이 전시돼 있다.
임고서원 앞에 새롭게 조성된 선죽교는 개성의 선죽교를 전통방식으로 재현했으며 옆에 평교도 같이 설치했다.
임고서원충효문화수련원은 어린이들이 예절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충효관은 40명의 단체숙식이 가능하고 회의실도 갖추고 있다.생활체험관(충효관)은 통한식목구조로 정면 14칸, 측면 7칸 등 건축면적 646㎡ 규모로 40여 명의 단체 숙식이 가능하고 회의실도 겸비해 선생의 충효사상을 본받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특히 이곳을 찾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임고서원 연혁과 정몽주 선생의 일대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영상실에서 상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