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국가 무형 문화재 제 48호 단청장 이수자
고향 포항시 남구 오천읍서 14일까지 개인전

박정민 이수자가 수백년 된 옛 기와에 탱화 기법을 활용해 꽃을 그려 넣은 공예 작품을 가리키고 있다.
‘혼(魂)을 담아 부처님의 마음으로 불화를 그리다.’

“…아이는 4살 때 앓은 홍역으로 소리를 듣는 신경이 타버려 1급 청각장애를 얻었다.

깊게 상심한 어머니는 종교 힘으로 아들을 치유·위로하고, 아픈 마음도 달래고자 집과 가까운 포항 오어사에 함께 자주 들렀다.

나무 작대기로 모래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스님은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다. 또 말문도 장가를 가면 트인다’고 예언 같은 말을 했다.

이후 천부의 재능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혼자 예술 세계를 조용히 거닐고, 대학 선배이자 조교로 자신을 지켜준 아내를 만나 평생의 동료이자 반려자를 얻었다.

또 매서운 거장 은사를 만나 탱화와 단청 등을 사사했다. 지금은 전국 각지 사찰에서 탱화 불사와 불상 복원, 단청 제작에 매진한다.

나아가 전통 불교 미술과 현대 미술 접목으로 세계에 우리 아름다움을 알리는 아름다운 꿈을 부부가 함께 꾸고 있다.…”
박정민 이수자가 옛 소반에 꽃을 넣은 작품.
한편의 잔잔한 영화 같은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은 포항시 남구 오천읍이 고향인 박정민(59) 국가 무형 문화재 제 48호 단청장(단청·불화) 이수자다.

박 이수자와 2살 연상 아내 이경숙 문화재 제1740호 도금기능자 금박장 부부를 지난 4일 오천읍 문덕파출소 옆, 개인전 공간에서 만났다.

대화 대부분은 그의 귀, 입이 돼 주는 아내 이경숙 씨와 주로 했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전통불교미술원을 운영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 중인 박 이수자는 어릴 적 인연이 깊은 고향 오어사에서 지난해부터 올가을까지 나한전 보수와 종무소·공양간 단청 불사를 아내와 함께 했다.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덕파출소 옆 개인전 공간 한 벽면에 박정민 이수자에 대한 작품과 보도 기사들이 스크랩 돼 있다.
지난달 22일부터는 옛 기와나 마룻장, 소반, 조약돌, 주걱 등에 탱화 기법으로 금으로 예쁘게 꽃 등을 그려 넣은 크로스오버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단 3일 짧게 하려던 ‘처음이자 마지막 고향 전시회’는 소식을 접한 친구, 지인과 지역 주민의 많은 관심과 방문으로 오는 14일까지 연장을 수차례 거듭해 운영한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 홍역을 심하게 앓아 귀가 거의 들리지 않지만, 머리는 영특해 한번 본 사물이나 풍경을 그대로 그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종교의 힘이라도 빌려 아들 청력을 되찾을 생각으로 마을에서 십리(4㎞) 가량 떨어진 오어사 절을 자주 찾았다.

아들은 절을 자주 다니면서 불화나 단청을 보고 불교 미술에 점차 매력을 느껴 스스로 십리 길을 어린 나이에도 직접 찾아갔다.

거기서 만난 어릴 적 은사 정관스님으로부터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이 아닌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갖고 있다’는 말로 예술적 재능을 인정했다.

또 부처님을 그리는 일을 하며 복을 쌓으라고도 했다.
박정민 이수자가 옛 기와와 조약돌에 탱화와 단청 기법을 적용해 꽃을 그려 낸 작품.
“말문이 트이려면 장가를 가야 한다”라는 말도 들어 어머니는 성인이 된 20살 때부터 아들을 빨리 결혼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인연은 따로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불교와 예술에 대한 접점을 공유하고, 그림을 잘 그린 그는 학급 간부를 할 정도로 친구들과 우애도 좋았다.

빼어난 그림 실력으로 인기도 높았다고 한다. 귀가 들리지 않아 받아쓰기는 부족했지만 뛰어난 머리에 이과 과목은 아주 좋았다.

불교 산실인 동국대 동양화과에 진학했고, 2학년 때 불교미술학과가 생겨 전공을 바뀌고 1기 졸업생이 됐다.

실력은 뛰어났지만 ‘청각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이른바 ‘왕따 아닌 왕따’를 당했다.

그런 그를 대학 조교인 이경숙 씨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감을 발휘해 그림자처럼 많은 도움을 줬다.

그렇게 싹튼 감정은 둘이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논문 작성 도움 등으로 이어졌고, 이후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른이 넘어 결혼에 골인, 평생 반려자가 됐다.
금박장인 아내 이경숙의 금제 작품들.
아내 이경숙 씨는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어린 아이 같은 남편이 답답할 때도 많지만 서로 부족한 부분에 힘의 돼 주며 작업을 함께 하며 ‘전생의 도반(함께 불도를 수행하는 벗)’이었던 인연이 아니었나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이어 “특히 3일 밤낮 동안 조명도 없이 선을 그리며 탱화 그림에 몰두하는 남편은 마치 삼매(三昧·한 가지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일심불란 경지)에 빠져 평온한 모습으로 ‘천상의 신’이 지상에 내려와 불화 작업을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애정과 함께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는 대학 졸업한 후, 탱화 거장인 고 원덕문 월주스님(무형문화재 제 48호)께 사찰 탱화, 단청, 벽화 등을 사사(師事)받기 위해 하루에 200~500장 그림을 그려내는 고된 생활을 했다.
박정민 이수자와 아내 이경숙 금박장이 제작한 공예품.
막내 제자였던 그가 모든 수업을 마칠 때 관례적 선물은 ‘탱화 밑그림’ 하나 하사받지 못하자 “왜 주지 않느냐”고 아내가 스님께 따져 물었다.

스님은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모든 밑그림이 저장돼 있다. 오히려 밑그림을 주는 것이 창의력을 해치는 만큼 그가 그리고 싶은 대로 두라”는 답을 했다.

흡사 염화미소(拈華微笑·말로 통하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 석가모니의 마음을 읽었던 수제자 마하가섭의 일과 달마대사가 그동안 얻은 바를 물었을 때 말을 끊고 제자리에 서 있어 ‘나의 골수를 얻었다’고 칭찬받은 혜가의 고사를 떠올릴 수 있는 일화다.

박 이수자가 본격적으로 인정 받은 것은 지난 1994년 삼성재단 주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일본에서 가져온 고려 탱화 50여 점 전시회 때였다.

그는 이 전시회에 시현 불화가로 참석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일본에 빼앗겨 안타까운 고려 탱화를 그대로 그려 달라고 요청했고, 밤늦게 집에 와서 두 어시간 잠도 별로 못 자고 다시 새벽에 나가 대여한 한 달 동안 우수한 불화를 눈에 익히고 그대로 다시 그려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과 불화를 약탈해간 일본에 대한 감정으로 지금도 일본 쪽에서 불화를 그려달라고 해도 단호히 거절한다.

불국사 괘불탱화를 비롯해 은해사, 백흥암 등 수많은 사찰 개금보수, 단청, 탱화 작업과 문화재 보수를 혼을 담아 했다.

특히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금강 신장과 같다. 군인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호국불교 마음에서 포교사 자격증을 보유한 박 이수자는 군 법당 보수도 재료비 등 최소비용만 받고 재능기부를 하며, 군인들이 좋아하는 빵·햄버거 등을 많이 선물한다고 전했다.
박정민 이수자와 아내 이경숙 금박장이 제작한 공예품.
박정민 이수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떠듬 떠듬 말로 “어린 시절 냇가에서 보면 반짝 반짝이는 사금이 많이 있었다”며 금가루(금물)로 선을 그리고 채색하며 부처님을 그리는 금채 탱화와 인연이 깊음을 드러냈다.

아내는 “불화는 그 시대 상황 반영하는 타임캡슐과 같다고 생각한다. 수백 년 후 지금 현재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지옥도에도 악귀가 스마트폰을 들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열린 사고를 보였다.

박 이수자는 ‘모든 사람이 신선이자 부처다. 세상을 다 부처님이자 내 마음 같은 마음으로 바라 본다’를 평생 가치관으로 삼고 있다. 많은 유혹과 말에 흔들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처럼 부처님과 같은 바른 마음 가짐으로 자신의 일에 혼을 담아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부부는 향후 꿈에 대해 “불교미술과 현대미술을 접목해 법고창신, 새로운 전통을 만들고 또 해외 전시회 등 작품활동을 통해 우수한 우리 문화와 예술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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