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랑이라는 지우개를 가지고 있다 시를 쓰며
지우면 그 자리에 물랑이 생긴다
어느 날은 오른쪽 손목에서 단어가 떨어지지 않는다
지우개로 지우자 손목에 물랑이 생긴다
어느 날은 두 다리에 문장이 붙어 있다
지우고 너를 만난다
사라진 긴 문장만큼 걷는다
물랑 물랑 물랑
네가 사라질 것 같은 날들이 걸어가고
사랑이 그만큼 걸어오는 물결이 있다

어느 날은 시 한 편을 다 지운다
물랑물랑 온몸이
물결 속에서

남은 것을 생각해도
사라진 것을 생각해도

물랑은 볼 수 없다.





<감상> ‘몰랑’이란 것이 보이지 않으나 지우개와 결합되니 내가 몰랑해지네요. 네가 사라질 것 같은 날들이 걸어가고 사랑의 물결도 파문이 이네요. 시가 탄생하는 지점도 몰랑몰랑해야 가능하지요. 딱딱한 사물을 바라보면서 매만지고 몰랑하게 만들어야 시가 온몸에 물결처럼 다가오지요. 철학으로 가기 전, 몰랑몰랑한 세계가 바로 시의 자리이지요. 사라진 것과 남은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없이는 ‘몰랑’이 다가오지 않고 볼 수도 없으니까요. 몸과 생각이 딱딱해지지 않도록 몰랑하게 만드는 연습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아요. <시인 손창기>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