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낮은 돌담길 굽이굽이 어깨동무 한 고택의 풍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이곳에 도읍을 만들려다 큰 내(川)가 없어 무산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 가운데 한 곳으로 선비들의 은둔처로 각광 받았다. 그만큼 선비들의 교류가 잦았고 번성했다고 한다.
함양 박씨 주부공 종가의 작은 집에 해당하는 미산고택이 마을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미산고택은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으며, 대원군이 미산재라고 현판을 써 주었다고 전해진다. 큰맛질에서 용문면사무소 방면으로 가다 보면 작은맛질이 나온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 야옹 권의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마을이다. 동양 최초 음식조리책‘음식디미방’을 지은 정부인 장씨의 외가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장씨 부인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와 맛질의 요리를 배워 익혔을 것이다. 안동 권씨 입향조 권의를 모시는 야옹정 사당이 눈에 띄고, 춘우재 종택과 연우 고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마을에서 나와 우측 금당실 마을 방향으로 포장도로를 따라 방두들고개를 넘으면 큰 고건축물이 웅장한 초정서예관이 눈에 띈다.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필이자 5대 국새의 글자를 새긴 초정 권창륜 선생이 원장이다. 이곳에서는 초정 선생이 직접 이론 강의와 실기 지도를 한다. 또 귀중한 서예유물들도 상시 전시돼 있다. 도로를 따라 금당실 마을로 향한다.
마을 이름인 ‘금당실’은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지나가면서 ‘달구리재(학명현)가 앞에 있고 개우리재(견곡현)가 오른쪽에 있으니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고 해서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정표 따라 돌담길을 걷다 보면 금곡서원, 덕용재, 우천재, 추원재와 사당, 반송재 고택, 사괴당 고택 등 보존가치가 높은 고택이 즐비하다. 집안이 훤히 보일 정도로 나지막한 돌담이 마을을 깊숙이 가로 지르며 S자 형태로 흘러들어 간다. 돌담길은 집안을 연결하며 미로처럼 뻗어 있다. 길을 잃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군위 한밤마을 돌담길처럼 시간을 잊고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 된다. 예천 금당실 가서 옷 자랑 하지 말고, 구례 가서는 집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다시 발길을 돌려 금당실 송림을 둘러본 뒤 맞은편 도로 지나 상금교 건너 오른쪽 금곡천 따라 걸으면 죽림리(竹林里·대죽마을)가 나온다. 죽림리는 우리나라 최초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과 일상생활을 기록한 ‘초간일기’를 지은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1534~1591)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예천 권씨 집성촌이다.
초간은 1560년(명종 15) 문과에 급제해 좌부승지 관찰사를 지낸 뒤, 1591년(선조 24)에 사간(司諫)이 됐다. 일찍이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해 학문에 일가를 이뤘고,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과도 친교가 두터웠다. 초간 선생은 죽림리에 머물며 매일 북두루미산의 산자락을 따라 초간정사를 오갔다. 그 예던 길은 사색의 길이고 명상의 길이었다. 초간종택에서 초간정을 가려면 옛길의 자취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걷기를 마치고 나무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세상은 넓고 복잡하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마음 쓰이는 구석도, 속상한 일도 많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고 일상이 허무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탈로, 유흥으로, 독특한 취미에 집중하는지 모른다. 일단 걸어보자. 걷다 보면 자신을 만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바로 자연이다. 다른 생각을 떠올릴 이유도 없다. 그저 걷고 또 다음 목표를 향해 갈 뿐이다. 그러다 목표지점에 도달한다. 걷기는 단순하고 거친 여정이 자신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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