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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경 변호사
그토록 무더웠던 긴 여름밤도 지나고 찬바람이 불어 아침저녁으로 초겨울의 한기마저 느껴진다. 골목길 주택 안마당에는 감이 주저리 달리고 하늘에 초승달은 을씨년스럽다. 귀뚜라미 소리가 가을밤 속을 짙게 달리는 주말을 이용하여 명나라 후기 양명학의 창시자인 양명 왕수인의 ‘傳習錄(전습록)’을 읽었다. 성리학이 과거급제를 위한 학문으로 형식적으로 흐르고 교조화되어 사상의 자유를 질식시킬 때 육구연의 심학을 더 발전시켜 양명학을 창도하였다.

전습록은 왕양명의 제자들이 양명의 말씀을 기록하거나 편지글을 모아 편찬한 양명학의 교전과 같은 것이다. 종교와 철학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양명은 심즉리설, 지행합일설, 치양지설을 핵심으로 새로운 유학을 개창하였다. 송나라 주자의 성즉리설, 격물치지설, 선지후행설에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 주자는 인간의 성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뉘는데 순연한 본연지성이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본연지성이 기질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수양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사물의 이치와 도를 먼저 알아야 그에 맞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하여 격물치지설과 선지후행설을 강조하였다.

왕양명은 온갖 집착과 시시비비의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요히 있으면서도 보고 듣고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가 있는데 이를 마음 곧 심(心)이라 했다. 따라서 양명은 마음이 곧 인간의 본성인 성(性)이요 ‘참나’라고 했다. 그리고 성이 우주의 진리인 리(理)와 같은 것이므로 마음이 곧 리라고 하여 심즉리설을 주창한 것이다. 양명은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알기 위하여 외부의 사물을 궁구할 필요 없이 내 마음을 가리는 악폐를 제거하고 분별심을 떠난 내 안의 마음을 궁구하여 그대로 발현시키면 그것이 하늘의 이치 곧 진리라 하였다.

주자는 선지후행 즉 먼저 진리를 깨친 후에 행하라고 하였다. 양명은 지행합일을 주창하였다. 앎은 실천의 주된 의지이자 시작이며 실천은 앎의 성취라고 하여 앎은 실체적인 실천행위를 통해서만 참된 앎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양명은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실천을 위한 치양지설(致良知說)을 주창하였다. 나와 우주 만물은 둘이 아닌 하나이므로 이웃이나 천지만물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자각이 곧 양지(良知)이다. 이러한 자각과 양지의 발현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우주만물을 존중하고 아낄 수 있는 것이며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은 오직 하나 사랑하라는 계명뿐이다. 예수는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구약성서의 모든 율법을 일자 일획도 어기지 않고 지키고 완성하였다. 예수는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입으로만 말하고 교회에나 다닌다고 믿는 자라 할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식이 될 수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믿음의 표상이 겉으로 나타나야 하고 믿는 자의 표상은 사랑이라는 열매이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성경을 배워서 안다고 한들 그것은 무익한 것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하나라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너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라는 통찰과 거듭남이 있을 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실천의 힘이 생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인 형제라는 앎이 곧 실천의 주된 의지이며 실제적인 사랑의 실천행위를 통해서만 참된 믿음과 거듭남이 완성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다 믿는다 말만 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겨자나무는 모두 베어 지옥의 불아궁이 속에 집어 던져 버리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사 사람의 아들로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으로 역동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왕양명의 치양지설의 의미이기도 하다. 믿음은 시작이요 사랑은 곧 완성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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