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노론은 영조를 압박했다. 이광좌 조태억 유봉휘 조태구 최석황 등 5대신을 극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나도 분하고 원통하지만 무고를 밝혔으면 그만이지 보복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영조는 여러 번 노론을 달랬지만 노론은 전원 사직서까지 감행, 극형을 계속 주장했다. “경들은 왕을 사람 죽이는 일만 하도록 하려는가”영조는 마침내 화가 폭발했다.

노론에 시달린 영조는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근본 대책을 강구하면서 다시 한 번 정국을 뒤바꾸는 환국을 결심했다. 영조는 민진원 등 노론의 대신들과 관료 140명을 축출하고 그 자리를 소론으로 대체했다. 이 정국전환이 영조 3년에 일어난 ‘정미환국(丁未換局)’이다.

그런데 집권당 소론 정권을 난처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인좌는 과거 소론파와 함께 남인을 포섭, 왕의 교체를 기도했다. 영조의 경종 독살을 선동, 소현세자 혈통에서 새 왕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전에 역모가 탄로 나자 이인좌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청주성으로 쳐들어가 청주성을 점령했다. 출정을 자청한 소론의 온건파 오명항이 군사를 이끌고 가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인좌는 산사로 도망쳤지만 승려들에게 붙잡혀 처형 당했다.

소론에 의해 이인좌의 난이 진압됐지만 소론이 주도한 반란이었기 때문에 소론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히 약화됐다. 정권은 다시 노론의 손으로 넘어갔다. 정권 실세가 된 노론은 난을 평정한 오명항까지 탄핵, 소론궤멸작전을 벌였다. 오명항은 자신이 탄핵당했다는 쇼크로 병이나 죽고 말았다.

치열한 붕당정치의 현실과 한계를 보면서 그 병폐를 뼈저리게 느낀 영조는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당파성이 지나친 걍경파들을 제거,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등 4색당파를 고르게 쓰는 탕평책을 시행했다. 강경 붕당파들이 탕평책을 비난하자 영조는 호통쳤다. “이 나라가 뉘 나라더냐. 노론과 소론만의 나라냐?”

정부는 국민 70% 이상이 원전을 찬성하는 데도 탈원전에 집착하고, 일자리 참사가 계속 되는데도 소득주도 성장을 고집하고 있다. “이 나라가 뉘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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