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신 장양수 선생 학문·덕행 남대천 따라 유유히 흐르네

월계서원 전경.
울진읍에서 고성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가원교가 나타난다.

이 다리를 건너 가원동 마을로 접어들면 고즈넉한 형태의 한옥으로 지어진 월계서원이 터를 잡고 있다.

본래 월계서원은 1856년(철종 7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장말익(張末翼)과 장양수(張良守)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울진읍 무월리에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이후 서원을 찾는 사람이 점차 늘자 1862년 월계(月溪)라고 사액 돼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왔다.

그러던 중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발령돼 문을 닫았고, 그 뒤 1924~1925년 후손들과 지역 사람들이 뜻을 모아 현 위치인 고성리에 서원을 짓고 세덕사(世德祠)라 이름 지었다.
월계서원 정문
이후 3년 후에는 다시 경덕사(景德祠)라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월계서원이라는 이름은 1945년에 변경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서원은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월계서원 현판
평면은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중당협실형으로 앞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 마루가 설치된 전형적인 고택의 모습을 갖췄다.

서원 앞으로는 울진 남대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막고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월계서원에는 우리나라 행정 문서로는 가장 오래된 장양수 급제 패지가 소장돼 있다.

이 급제 패지는 장양수가 1205년(희종 1년)에 진사시 병과에 급제해 내려진 급제 패지로 현재 남아있는 실물 4건과 전사(轉寫)기록 2건 등 총 6건의 고려 홍패 중 가장 오래된 실물로서 국보 제181호로 지정돼 있다.

장양수 급제 패지에는 세로 44㎝, 가로 88㎝의 누런색 마지(麻紙) 두루마리에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로 종 12줄이 기록돼 있다.
장량수 급재 패지.
현재 내용과 관련해 학자들은 불과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독이 가능하다고 하며, 육안으로는 ‘우인장양수교가병과교고첩급제첩지(右人張良守敎可丙科敎古牒及第牒旨)’ 등의 글자가 어렴풋이 보인다.

월계서원 남쪽 언덕에는 장량수와 장말익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죽변면 후정리 매정마을 용호 언덕에는 이들을 기리는 제단과 비가 세우져 매년 후손들이 제향하고 있다.

월계서원 장량수국보각.
△장말익·장양수 선생과 월계서원

장말익 선생은 월계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평장사상주국(平章事上柱國)이란 벼슬에 올랐고, 울진 장씨의 시조다.

고려 성종조 사람으로 호는 매계(梅溪)요, 시(諡)호는 문성(文成)이며, 울진군(蔚珍君)을 봉했다.

울진 장씨는 40여 본의 장 씨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서 귀화한 덕수장씨를 제외하면 안동장씨를 대종으로 해 분파된 것으로 간주 되고 있다.

장말익의 후손들이 번창해 용궁파·연안파·청송파·직장공파·낭장공파·삼척 강릉파·관북 부녕파 등 여러 지파를 구성하고 있다.

울진장씨는 울진의 토성 중의 하나다.

장말익이 1036년(정종 2년)울진부원군에 봉해지면서 정착한 이래 후손들이 울진을 관향으로 사용하게 됐다.

울진 부원군으로 재직한 장말익은 선정을 베풀어 고을 주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또한 삭방도안렴사로 재직할 때는 울진 읍성을 개축하기도 했다.

장양수 선생은 장말익의 8세손으로 1205년(고려 희종 원년) 급제해 추밀원부사, 봉익대부 전리판서 상호군을 지냈다.

장양수의 부친은 문과에 급제해 동정(同正) 벼슬을 지낸 장한련이며, 모친은 울진 임씨다.

김형소 기자
김형소 기자 khs@kyongbuk.com

울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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