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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사투리보존회장
20여 년 전 고서(古書)에 관심이 있어 골동품을 취급하는 사람에게 고서가 생기면 사겠다고 해서 몇 차례 구입한 적이 있다. 한문을 읽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배워서 읽어 볼 요량이었다. 그런 것이 20여 권 된다. 그러나 그때 구입해 쌓아놓고는 아직 까만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 어느 날 훈민정음 해례본 사건이 인근 상주에서 터졌다. 소왈 국문학을 공부하고, 글을 쓴다는 처지라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상주시 낙동면 구잠마을 훈민정음 해례 상주본이 나왔다는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집에 그 주인공은 없고, 그의 형님이 계셨는데, 집 그 자체가 골동품이었다. 오래돼 낡고 허물어져 가는 집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옛날 물건들로 가득했다.

주인공은 구속돼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골동품가게에서 훔친 혐의였다. 1조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이 책과 비슷한 간송미술관 것보다 더 좋은 것. 이것을 훔쳤다니 1심은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며, 이에 따라 복역 중인 것이었다.

그래서 항소심 정보를 알아 대구지방법원 재판정에도 가 보았고,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옥중에서 쓴 무죄를 주장하는, 훔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은 수십 통의 편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법정진술이나 편지내용을 보았을 때,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아 석방될 확률이 높다는 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무죄로 석방됐다.

그러면 그것으로 훈민정음 해례 상주본은 주인공의 것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었다. 형법에서 훔친 증거가 없어 무죄가 됐지만, 이미 대법원이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판결했기 때문이었다.

법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 일반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동산의 소유권을 확인하는 기본은 점유인데, 이를 점유한 주인공이 소유자가 아니라니 참 아리송하다.

그런 어느 날 그 전에 구입한 고서 중에 한문과 한글이 병기된 것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혹시? 훈민정음 해례본? 석보상절 해례본? 그런 생각이 조바심을 일으켰다. 집으로 들어가 책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주역 언해본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알아보니 별거 아니었다. 시중에 수만 원에 거래되고 있는 흔한 책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 그 주인공에게 감정을 받아 볼까 싶어 지인을 통해 그를 모셨다. 수십 년 이 마당에서 잔뼈가 굵은 주인공. 흰 머리카락이 반듯한 스포츠머리에도 나오고 있어 연륜을 말하고 있었다. 맑은 눈동자와 남을 속일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 그러나 밥을 사면서 내 물건의 감정은 의뢰하지 않고, 그동안 훈민정음 해례본에 얽힌 이야기와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다.

그의 이야기 결론은 국가에 대한 원망이었다. 국가의 업무를 집행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었다. 있지도 않은 물건을 기증받고, 그 기증서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국가. 법원이 민법상 기증자의 것이라고 판결하고, 기증자가 이를 국가에 기증한 현실. 그러므로 법원으로부터 점유자인 주인공의 것이라는 판결을 받아오기 전에 소유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국가. 접점도 없고, 솔로몬의 지혜를 갖고 해결해 줄 사람도 없다. 오직 주인공만이 해결해야만 하는 처지다.

그래서 주인공은 국가의 반환청구를 막아달라는 재판을 청구했다. 그러나 최근 1심은 이를 뒤집지 못했다. 이제 항소심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간단하다. 민법 판결이 형법 판결보다 먼저 내렸으므로 사정이 변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일반인들의 법 감정(感情)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 시차를 달리해 내린 판결을 일치시키면 된다. 그 전에 국가는 주인공을 압박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공의 소리에 귀를 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대체 국가가 무엇인가? 훔치지 않은 물건을 갖고 있는 국민의 소유권을 왜 바루지 못할까? 하루속히 일반상식이 통하는 재심판결이 이루어져 주인공이 국보급인 이 책을 어둠 속에서 꺼내 밝은 얼굴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한글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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