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닮은 절재된 공간 명재상 서애 발자취 오롯이

병산서원 전경
△‘하늘이 내린 재상’서애 류성룡의 혼이 깃든 곳.

안동 하회 병산서원은 자연과 조화하는 한국 서원건축의 공간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곳으로 현재 소수서원, 도산서원 등 9곳이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병산서원은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극복해 ‘하늘이 내린 재상’으로 알려진 서애 류성룡(1542~1607)과 그 아들인 수암 류진(1582~1635)을 배향하고 있다.
병산서원 배롱나무
병산서원의 모체는 풍악서당이다. 이 서당은 안동 풍산읍내 도로변에 있어 시끄러워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1572년(선조 5)에 서애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풍악서당은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7년 재건됐다. 풍악서당이 서원으로 바뀌게 된 것은 1614년(광해군 6)에 사우를 건립하고 서애의 위패를 모시면서부터다. 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병산서원 편액
이곳은 1868년 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 시에도 폐철되지 않은 곳이며 소수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5대 서원에 손꼽히는 곳이다. 또 자연과 조화하는 한국 서원건축의 공간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병산서원
△ 자연과 조화된 병산서원의 미(美).

병산서원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절경과 건축미다. 빼어난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이라 불렸는데 아마 병산이 없었다면 이곳이 절승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푸른 병풍 같은 절벽을 의미하는 병산은 두보의 ‘백제성루’라는 시 내용을 인용해 그렇게 지었다. 만대루에서 주변 경관을 조망하면 화산을 등지고 낙동강이 백사장과 함께 굽이쳐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7칸의 단순한 만대루의 기둥과 건물은 다양한 선의 연속에 의해 주변 경관을 수직적으로 분절시키고 병산서원의 집합적 질서의 묘미를 집약하는 공간이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특히 입교당에서 바라보는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정형미를 외부의 자연경관과 연결시켜 수평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 때문에 만대루와 입교당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고건축, 특히 서원 건축양식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건축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대루
서원 정문인 복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당이 있고, 맞은 편 한 단 높은 곳에 이 층 누각 만대루가 가파른 계단 위에 옆으로 길게 서서 유식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만대루에서는 주변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입교당에서는 자연과 조화된 병산서원의 미(美)를 더욱 느낄 수 있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마당 좌우의 동재와 서재, 그리고 맞은편의 강당 건물인 입교당이 강학공간을 형성한다.

강당 대청 한가운데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앞쪽을 바라보면, 서원 일대의 경관이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 들어온다. 만대루 이 층 일곱 칸 기둥 사이로 강물과 병산과 하늘이 일곱 폭 병풍이 되어 얽히며 펼쳐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것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극적인 공간 분위기를 만들며 바로 나 자신이 자연 가운데에 묻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강당 동쪽 옆을 돌아 들어가면 제향공간인 사우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사우인 존덕사에는 북벽에 서애를 주벽으로 모시고, 동벽에 수암을 종향하고 있다.

△ 류성룡의 학문과 행적.

류성룡은 1542년(중종37) 황해도 관찰사였던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의성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나 1607년(선조40)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생애는 풍전등화였던 조선의 운명과 겹쳐지고 연결돼 있다.

서애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1세에 예를 갖추어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 이황은 서애에게 올바른 도리로써 앎과 행동의 근본을 다지는 공부를 주문했고, 이러한 충고는 전 생애에 걸쳐 서애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다.

서애는 관념론에 치우치기보다 실용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치밀했다. 그는 시문·경사·도학·의례·군사·의학·정치에 이르기까지 박학했으며 이를 실질적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특히 그는 완고한 유학자들의 관념론에 대해 서슴없이 비판을 했다. 문벌로 적을 칠 수 없다는 그의 사유는 노비라도 적의 목을 가져오면 벼슬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듯 경세가로서 일세를 풍미했다.

그의 이러한 해박한 지식과 경륜은 국난을 맞고서야 곳곳에서 빛을 발휘했다. 임란 7년의 극복은 그가 총 연출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임란에 대처한 그의 공적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권율과 이순신의 파격적 발탁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임란의 최종 승리는 불가능 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서애의 사람을 바로 보고 제대로 쓸 줄 아는 안목은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선조 일행이 한양을 버리고 개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이 난국 타개책을 건의했을 때도 그의 판단력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당시 조정은 8도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명나라에 망명해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서애는 선조를 향해 “임금께서 한 발자국이라도 우리 땅에서 떠나시면 조선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 도가 여전하고 호남에서 충의의 선비들이 곧 봉기할 터인데 어찌 경솔하게 명나라에 내부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직언했다.

서애의 말처럼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난 극복의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그의 혜안과 경륜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서애는 선조 24년에 좌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4월 13일에 임란이 발발하자 군정의 최고위직인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정치 군사 외교의 업무를 총괄했다. 7년 전쟁 발발 다음 해인 1593년 10월부터 종전 무렵인 1598년 11월까지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병행하며 종횡무진 국난을 극복하는 데 매진하여 조선이 최종 승리자가 되는데 1등으로 공헌했다.

서애는 57세 되던 해 낙향하여 6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9년 동안 후학양성과 저술에 몰두했다. 이 기간 중 스승인 이황의 행장을 기록한 ‘퇴계선생연보’와 풍산류씨의 가계인 ‘종천영모록’ 그리고 ‘징비록’등을 저술했다.

류성룡의 고제인 우복 정경세는 “공은 ~~ 항상 경제의 일에 유의하였고 예악에 의한 교화 외에 군사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과 이재 등의 일을 자세하게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재주는 사무에 대응하기에 족하며, 학식은 쓰임을 다하기에 족하다”라고 행장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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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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