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호국 발자취 따라 한걸음 한걸음 가을을 즈려밟다

기날저수지.
김천에는 걷기 좋은 모티길이다. ‘모티’는 ‘모퉁이’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직지문화모티길(4.5km), 사명대사길(4.5km), 인현왕후길(9km), 수도녹색숲 모티길(15km) 등 4개의 길이 있다. 직지문화모티길과 사명대사길은 직지사 주변, 인현왕후길과 수도녹색숲 모티길은 청암사 주변에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접근성이 좋고 주변에 볼거리가 많을 뿐 아니라 걷기에 불편함이 없는 직지문화모티길을 걸었다.
직지문화모티길 안내도.
솟대.
출발은 직지공영주차장. 버스를 타고 왔던 길로 걸어 내려간다. 대항면 주민들이 만든 솟대거리를 지나면 쉼터가 나타나고 이내 지천마을과 합천마을을 만나게 된다.
대항면 주민이 세운 솟대.
솟대.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 직지저수지 방향으로 걷는다. 걷다 보면 김천 과하주(過夏酒) 공장과 직지저수지가 보인다. 본격적인 모티길이 시작되는 셈이다.

직지저수지는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기날마을 앞에 있다고 해서 기날저수지라 부르고, 몇몇 지도에는 복전저수지로 나와 있지만 정식 명칭은 직지저수지이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공장에서 만드는 김천 과하주는 무형문화재 경북 제11호로 지정돼 있으며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주로 김천 특산물 중 하나다. 술 이름이 참 멋지다. 여름이 오기 전, 봄에 만들어서 마셨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날저수지 가는 길.
과하주는 약주와 소주를 섞어서 빚은 술인데 조선 초부터 일제 강점기때까지 유명했다고 한다. 향과 맛이 좋아서 왕에게 진상됐던 술이다. 직지저수지 안쪽 길을 걷기 위해 제방 길을 따라 건너간다. 저수지 치곤 상당히 큰 규모다. 주변 곳곳에 낚시하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물고기가 꽤 잡힌다고 한다.

가을 햇살이 뜨겁지만 길은 저수지 옆 나무숲 사이로 조성돼 있어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걷기에 좋다. 저수지 길옆에는 염소가 사람을 경계하면서 끊임없이 울어대고 있다. 저수지를 끼고 도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 괘방령으로 가는 큰 도로와 만난다. 큰 도로 따라가다 보면 큰 느티나무 아래 기날마을 쉼터에서 잠시 목을 축이며 쉰다.

사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 구간은 직지사에서 괘방령(掛榜嶺)으로 향하는 고갯길을 새롭게 단장한 길이다. 괘방령은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매곡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걸‘괘(掛)’자에 방붙일 ‘방(榜)’자 말 그대로 ‘방을 내건다’는 의미다. 예전에는 과거시험 결과를 도성이나 전국의 주요 길목에 붙였다. 그중 한 곳이 괘방령이었다고 한다. 괘방령은 경상·충청·전라도 경계에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괘방령에서 조정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오래된 마을들이 그렇듯이 큰 나무가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의 기날마을은 다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200년 전 새로 부임한 김천 군수가 부임한 후 관아가 있는 자리가 쥐의 형상이라 반대편에 있던 기날마을이 고양이 모양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버렸다고 한다.

기날마을이 보이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향천3길 도로명주소 안내판과 직지문화모티길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여느 마을처럼 콘크리트 포장길이다. 길옆 논에는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도토리와 밤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밤나무 아래는 이미 누군가가 다녀갔는지 껍질만 가득했다.

오르는 길 주변에는 포도나무 위에 씌워진 비닐들이 마치 거대한 비닐하우스처럼 보였다. 김천이 포도와 자두가 유명한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여름을 기다리게 만들었던 자두나 복숭아 대신 포도의 달콤한 냄새가 가득한 계절이 왔음을 알려준다.

전국 포도생산의 11%를 차지하고 있는 김천 포도는 당도가 높다고 한다. 통통하게 익은 포도를 보니 입안에 침이 고인다. 포도밭이 끝나는 곳에 있는 외딴집을 돌아 올라가면 숲 속으로 접어드는 길이 나온다. 이 부근에 작은 이정표라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길을 잃어버릴 일은 없지만, 이 길이 맞나 싶은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직지문화모티길 이정표.
길은 숲으로 울창해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나무들로 가득했다. 요즘 각 지역별로 다투어 만든 걷기 좋은 길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좋았는데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니 오히려 불편해진 곳들이 많은 것에 비해 직지문화모티길은 아직 사람들이 찾지 않아 혼자 사유하며 걷기에 좋다.
직지문화모티길.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앞서갈 사람도 없이 내 발걸음에 맞춰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은 울창한 숲으로 가려 하늘이 안 보일 정도다.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황악산 등산로와 사명대사길로 갈라지는 낮은 고개에 다다른다. 주변에 작은 정자도 만들어 놓았다.

직지문화모티길은 사명대사길과 함께 한다. 고개에서 왼쪽으로 원형의 길이 조성돼 있는 사명대사길을 따라 걷거나 곧바로 내려가 직지문화모티길을 걸어도 직지공영주차장에 도착한다. 여기서 각자 선택해서 걸으면 된다.

직지사 쪽으로 가기 위해 곧바로 잘 정비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쉼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사명대사길이다. 오른쪽으로 내려서서 걷는다. 울창했던 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온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직지요양원으로 올라가는 큰 도로와 만나는데 왼쪽으로 내려와야 한다.
직지사 정문.
차들이 다니기에 주변을 살피며 내려오다 한창 공사 중인 황악산 하야로비공원을 지나면 직지사가 보인다. 직지사는 사명대사와 오랜 인연을 대변하듯 주변 나무들은 짙은 푸름을 자랑한다. 직지사 입구 맞은편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과 백수문학관을 들러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잠시 시간을 내어 직지사 경내를 천천히 둘러본다.

직지사는 절 이름이 왜 ‘곧을 직(直)’에 ‘손가락 지(指)’, 직지(直指)일까? 몇 가지 유래가 있다.

첫째는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선산에 신라 최초의 절집 도리사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절이 들어설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

둘째는 고려 초 능여스님이 중창할 때, 자 대신 손가락으로 측량해 지었다는 설. 셋째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다. “말이나 글로 설명하지 않으며, 경전이나 책으로 전하지 않는다.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뜻.

참선 수행을 통해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담은 문장이다. 직지사는 다른 절집과 사뭇 다른 것은 건물들이 엄격한 격식을 따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어 분방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으로 가려면 단풍나무 숲을 지나는데 경내의 한 통로를 짙은 숲으로 만든 건 직지사가 유일하다. 또한 절집의 물길은 물을 밖으로 빼내는데 오히려 계곡 물길을 절집 마당으로 들여놓아 숲길 따라 전각의 담을 끼고 돌도록 했다.

특히 사명대사가 출가한 곳이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2000여 명이 넘는 승병을 일으켜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의 탁월한 외교력으로 조선은 우월적 입장에서 국교를 회복하게 되자 사명대사의 공로로 인해 직지사는 조선 8대 가람의 위치에 놓이게 됨은 물론 300여 소속 사암을 거느리게 됐다. 현재는 국내 25 본산(本山) 가운데 제8교구 본사(本寺)다.
직지문화공원 표지석.
직지사를 나오면 이내 직지문화공원이 나온다. 외국 작가들의 조형물을 감상하는 재미는 물론 다채로운 공연과 전시가 열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공원 도로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늘로 뻗어있어 이곳이 천년 고찰이 있음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직지문화공원에서 다리를 건너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처음 출발했던 직지공영주차장에서 걷기를 마치게 된다.
도로 곳곳에 세워진 조각품.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사람을 만나는 재미로 길을 걷는 사람이 있고, 세상을 만나고 자신을 만나기 위해 걷는 사람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따라 걷는 사람도 있다. 말 그대로 진정한 걷기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이고 무엇보다 대중교통의 접근성과 무리 없이 가볍게 걸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직지문화모티길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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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윤석홍 시인·도보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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