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린·애린정신으로 이웃 사랑 실천·지역문화 발전에 한 평생

제1회 포항개항제 대회사를 연설중인 이명석 선생
일제 강점기 해방과 6.25 전쟁으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전부였던 그 시절, 어려운 이웃을 돕고 지역 문화예술 육성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바로 재생 이명석 선생이다.

“선린·애린 정신으로 지역민을 사랑으로 보듬고 문화를 통해 인간다움을 실현하신 분”

이명석 선생의 3남이자 애린복지재단의 이사장인 이대공씨가 재생 선생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일제강점 시절 포항은 수탈의 현장이었고 6.25 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 지역으로서 지역민들의 피해가 막심했다.

이런 힘든 시절을 함께 이겨내기 위해 재생 선생이 인간사회에서 가장 따뜻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 답은 문화임을 깨달았다.

1904년 영덕 삼사에서 출생한 이명석 선생은 일찍이 대구 교남학교와 일본 간사이미술원을 거쳐 1933년 포항에 정착한 이후 포항인으로 살았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그는 일본어에 능통 했지만 강점기 시절 내내 일본인과의 거래는 물론, 본인의 어학능력을 돈벌이에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생 선생은 슬하에 둔 네 남매에게 일본과 천황보다 더욱 크고 위대하다는 의미의 이름을 주는 등 창씨 개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일제강점기 후기였던 1940년대, 강압적인 창씨 개명과 신사참배 정책을 온몸으로 견딘 재생 선생은 당시 포항제일교회 청년들과 뜻을 모아 관악대를 조직해 농촌 계몽운동과 더불어 몸과 마음이 지친 식민지 농어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가난과 궁핍으로 하루에 한 끼도 먹기 힘들었던 이 시절 이명석 선생은 이미 문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늘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재생 선생은 1946년에 포항문화예술협회를 구성해 예술 단체가 전혀 없던 포항에서 활동하던 예술인들의 구심점이 돼 그들의 활동을 돕고 지원하는 한편, 후학 양성에도 큰 노력을 쏟았다.

해방 직후 많은 지식인들이 포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차지하는 일에 앞장서는 동안에도 이명석 선생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실제로 재생 선생이 가진 재산은 1933년 포항으로 이주할 때 가졌던 상원동 260-5번지 집, 그 한 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부였다. 게다가 이 집마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청렴한 성품이었다.

재생 선생이 평생에 걸쳐 노력한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선린·애린 정신은 해방 이후 일제 시절 입었던 아픔도 채 낫기도 전에 터진 6.25 전쟁 이후 빛을 발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우리글을 깨우치지 못한 지역민은 수천 명에 달했고 당시 문맹자를 도울 수 있는 정부의 대책도 요원했다.
이명석 선생이 본인의 집에 설립한 애린공민학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명석 선생은 애린공민학교를 직접 본인의 집에 설립해 운영했다. 또, 당시 주변의 폭력과 괄시를 버티지 못하고 찾아온 한센인들의 후견인이 돼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명석 선생을 비롯한 미해병장병과 선린애육원생들
이대공 이사장은 “매일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한센인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 아버지와 그들의 식사를 차려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명석 선생과 선린애육원생들
이명석 선생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도우며 계속해서 지역문화 발전에도 힘써왔다.

6.25 전쟁 이후 지역민들의 터전 곳곳에 남겨진 뼈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시민들의 삶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그는 포항문화원을 설립하고 포항 최초의 문화제인 ‘개항제’를 4회까지 직접 운영했다.
제4회 포항개항제 가장 행렬에 참여한 이명석 선생
그는 또 독서운동과 도서관 설립 운동을 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60년대 초, 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으로부터 간이 건물을 임대해 ‘포항시립도서관’이라는 이름을 걸고 시민들에게 독서 활동을 장려했다. 도서관에서 볼 수 있던 책 중 대부분은 재생 선생이 집에 보유하고 있던 책을 기증받아 채워졌다.

이명석 선생의 평전을 엮은 김일광 작가는 “이후 시립서경도서관과 오늘날의 중앙도서관의 모체가 될 수 있던 데에는 이명석 선생의 노력이 뒷받침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화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재생 선생은 실제로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가 쓴 ‘추의 누(秋의 淚)’란 작품은 부일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했으며 ‘포항 시민의 노래’를 비롯한 ‘대해초등학교’, ‘오천중학교’,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교가도 직접 작사했다.

한편, 많은 예술인들은 가장 중요한 미래 산업으로 문화를 꼽는다.

또, 문화를 발전시켜 지역민들의 삶을 보다 행복하게 하고, 이를 통해 지역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덧붙인다.

김일광 작가는 재생 이명석 선생에 대해 “참 기독인이다. 한 평생 믿어온 종교적 신념에 따라 철저한 자기희생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희망이라는 씨앗을 심어줬다”라고 말했다. 또, “가난과 궁핍으로 끼니조차 챙기지 못할 때 재생 선생은 이미 교육과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구자”라고 덧붙였다.
지난 1998년 포항시 북구 수도산 덕수공원에 세워진 재생 이명석 선생의 문화공덕비
재생 선생은 당시 척박한 환경에서 뜨거운 사랑과 열정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인간 상록수’ 훈장을 받았고 1998년에는 포항지역 문인들이 뜻을 모아 선생이 생전에 자주 찾던 포항시 북구 수도산 덕수공원에 문화공덕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인간 상록수 훈장
문화는 그저 지켜만 본다고 발전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장인 정신을 통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예술의 싹을 틔우고, 그 예술에 관심을 갖고 후원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꽃을 피울 수 있다.

재생 이명석 선생은 수십 년 전 광복의 혼란과 6.25 전쟁의 뼈아픈 고난을 겪을 시기에 이미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포항지역 문화발전운동의 등불을 밝혔다.

선친이 지핀 등불을 유지하기 위해 지난 1998년 애린복지재단을 설립한 이대공 이사장은 20년째 사회복지, 장학, 학술, 문화예술 분야에 해마다 3억여원을 지원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있고, 지역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이들을 위해 애린문화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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