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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한국문학의 큰 별이신 김윤식 선생님이 타계하셨습니다. 아끼시던 속가제자(俗家弟子) 중의 한 명이었다고나 할까요? 제자 된 저로서는 큰 슬픔입니다. 선생님은 일면식도 없는, 미욱한 시골작가가 쓴 소설을 매번 꼼꼼히 읽으시고 과분한 칭찬과 따끔한 질책을 아끼시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나마 선생님의 명저(名著)들을 탐독하며 창작과 문학연구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 저로서는 지면에서나마 선생님의 가르침을 입을 수 있어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심리 묘사에 있어서는 이 작가의 오른편에 설 사람이 없다”라는 칭찬 말씀과 “우리소설의 샤머니즘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가상하다”라는 격려 말씀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직 철없던 20대였던 저로서는 선생님의 그 과분한 칭찬과 격려에 의기양양,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자만심마저 느꼈습니다. 물론 칭찬만 하신 건 아닙니다. 한 번은 제 심중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아버지 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장면을 두고 “말장난에 그칠 거면 아예 내뱉지 마라”라고 따끔한 매를 드신 적도 있었습니다. 선친(先親)의 젊은 시절 이야기(북한에서 관료로 입신하고 싶어 노동당에 가입하려 했지만 출신 성분이 나빠 매번 거절되었다는 회고)였는데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때만 해도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발언에는 상당한 조심이 뒤따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자기검열도 엄존했고요. 선생님은 저의 두서없는 표현 욕구를 두고 “말장난에 불과하다”라고 일갈함으로써 혹시 있을 지도 모를 탄압으로부터 저를 보호하려 하셨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입니다만, 북한에서 몇몇 우리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거론하면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선전(남한은 못산다)을 할 때 제 작품(난세일기)도 포함이 되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관련해서 정보기관에서 이것저것 저에 대해서 물어보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런 시절인데 눈치 없이 ‘노동당 가입 운운’하며 횡설수설했으니 선생님 보시기에는 딱하기 그지없는 무모하고 어린 제자였을 겁니다.

제게는 두 분의 문학 선생님이 계십니다. 한 분은 김윤식 선생님이고 다른 한 분은 황순원 선생님이십니다. 황 선생님은 처음으로 제 작품을 소설로 평가해 주신 분입니다. 선생님은 신춘문예 최종 선에 오른 제 작품을 두고 “관념이 너무 승(勝)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명심해서 저의 부족한 부분(묘사)에 더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서너 달 뒤에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受賞)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저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렇듯 제겐 잊을 수 없는 두 분 은사님이시지만 황, 김 두 선생님께서는 저를 가운데 두고 한때 대척점에 서신 일이 있었습니다. 김 선생님이 ‘한국소설의 샤머니즘적 체질’을 거론하면서 황 선생님의 소설을 비판했고 그것을 극복하는 작은 실마리를 제 작품에서 보신 것입니다. 황 선생님이 그것을 보시고 “요즈음 젊은 작가들은 세력을 가진 비평가의 지시에 따라 작품을 생산한다. 정말 터무니없다”라고 노여워하셨습니다. 그 ‘젊은 작가’가 바로 저였습니다. 물론 오해였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합니다만, 사실 그 무렵 저는 김윤식 선생님의 주장과 설명을 십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소설의 샤머니즘적 체질과 그 극복’이라는 것도 제 소설이 그 논의 안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읽었습니다. 그러니 ‘비평가의 지시나 명령’을 이행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제겐 없었습니다. 당연히 저로서는 김윤식 선생님의 혜안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산 증거니까요. 그렇다고, 황순원 선생님이 저를 몹쓸 제자로 매도하셨다고, 원망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착한 제자들은 언제나 선생님의 꾸지람 속에서 사랑을 읽어냅니다. 그래서 제 박사 논문이 ‘황순원 연구’입니다. 아마 당신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박사 논문이었을 겁니다. 두 분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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