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황금기 연 명재상 황의 소통·포용 리더십을 만나다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호국의 명산 백화산 아래 과수원 옆길을 따라 들어가면 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尨村 黃喜)를 모신 옥동서원(玉洞書院·경상북도 기념물 제52호)을 만나게 된다.
서원이 자리 잡은 수봉리에는 조선 시대 이래 장수 황 씨들이 대대로 터를 잡아 살고 있다. 석천이 북에서 남으로 마을을 향해 흘러와 입구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백화산과 만경산 사이를 흐른다.
수봉리에는 여러 자연부락이 있는데 학문에 일관해 도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 등이 담긴 오도(吾道)와 일관(一貫), 신덕(新德), 동산(東山) 등 정주학에서 연유한 땅 이름으로 모두 합해 천하촌(川下村)이라고 일컬었다 한다.
원래 옥동서원의 전신인 ‘백화서당’은 백화산 입구인 수봉리 신덕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원 주변 집들 감나무에 달린 붉은 빛 감들이 고운 자태를 뽐내며 서원에서는 옛 선비들의 삶의 향기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선현을 제향하고 학문을 연구해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워진 사설 교육기관인데 지금은 전국에 700여 개의 서원만 남아 있고 상주에도 많은 서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두 곳의 서원만 남고 모두 훼철됐다.
현재 15개 서원 정도가 복원됐으며 옥동서원은 전국 47개 미 훼철 서원 가운데 하나이자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 서원이다.
옥동서원은 조선 전기 문신인 황희(1363~145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1984년 12월 1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됐다가 2015년 11월 10일 사적 제532호로 승격 지정됐다.
황희는 태종(재위 1400~1418)과 세종(재위 1418~1450)대에 걸쳐 육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고 20여 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서 왕을 보좌했다. 학문이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한 분으로서 조선 왕조를 통해 가장 이름 높은 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518(중종 13) 축옹 황효헌과 유촌 황여헌 두 형제가 방촌 황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일명 ‘횡당’을 창건했으며 ‘백화서당’이라는 이름을 짓고 그 뜻을 유지했다.
백화서당은 말 그대로 방촌 황희 정승의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이었던 것이다. 1580년(선조 13) 새로이 영당을 건립해 춘추향사를 지내는 등 서원의 면모를 갖추고 백옥동 영당이라 일컬었다.
1714년(숙종 40) 사림들의 중론에 의해 사서 전식(全湜·1563~1642)을 배향하고 백옥동 서원으로 승격했으며 1715년(숙종 41)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사당인 경덕사에는 황희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식, 황효헌, 황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강당은 2층 형식으로 된 기와 건물로 교육과 회합 장소로 사용했다.
옥동서원은 서원의 기본적인 역할인 제향과 교육 기능 이외에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서원에는 방촌 황희 영정을 비롯해 ‘방촌선생실기’와 ‘반간집’, ‘황씨세보’, ‘장계이고’ 등의 책판을 비롯해 각종 고문서 300여 건, 현판 11개 등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다.
내년에도 옥동서원은 문화재청에서 진행하는 집중 육성사업인 ‘지역문화재 활용사업 290선’ 가운데 하나로 선정돼 서원의 역사문화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도 시시때때로 서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1871년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령 때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황희 선생을 유일하게 배향하는 서원이자 조선 후기 서원 건축의 본 모습이 잘 남아 있는 옥동서원, 지금도 당대 서원의 기능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을 가늠할 수 있는 기록 유산들을 전하고 있어 그 가치는 매우 높다.
이에 필자는 가을 향기 잔뜩 머금은 10월, 상주 옥동서원을 찾아 선비들의 삶을 향기에 취해보고 호국의 명산 백화산 길을 걸어 보는 건 어떨까 제안해 본다.